글들/일상

터어키 11월 25일

멀리가세 2007. 12. 30. 17:21

                                           째날, 11월 25일

 

 

 

 마르마라 호텔 2

 

  새벽 5시 반. 주변 회당의 스피커를 통해 어김없이 흘러 나오는 기도소리. 취하듯 일어나 우두커니 창밖을 내다 보았다. 겨우 동틀 무렵 희뿌연한 여명을 헤치고 지중해로 난 산책로를 걷는 여자. 뒷태가 닮았다, 어제 저녁 그 길 끝 난간에 기대서서 물끄러미 바다에만 눈길을 던져넣던 여자, 남들 다 돌아가고 어둠이 짙어지도록. 한번도 와보지 않은 곳에서 잃은 물건을 찾는 사람이 있다. 혹자는 정말 찾기도 하고, 또 혹자는 해변에 시체로 밀려 오기도 한다. 저승에 가서라도 찾아 볼라구 그랬나... 하기야 전생의 어디쯤, 내생의 어디쯤에서 이곳이나 그곳이나 다 있어봤던 곳일테니, 영원토록 회귀한다면.

 

                        

                         [들라크루아, 미솔롱기의 폐허 위에 선 그리스]

 

 그리스

 

  파묵칼레로 가기 위해 토라스 산맥을 넘었다. 이 산맥은 파면 대리석이라 할만큼 대리석이 많다고 한다. 언젠가 어빙 스톤이 쓴 전기소설 <르네상스인 미켈란젤로>에서 미켈란젤로가 대리석에 대해 가졌던 열정을 읽은 적이 있다. 그는 대리석 조각에서 조화와 균형을 통한 이상미의 구현이라는 그리스 예술의 정수를 느꼈다. 이는 신 중심의 중세를 벗어나기 시작한 르네상스가 복원한 이성과 인간 중심의 그리스문명이 미술에 투사된 내용일 것이다.

  반면 낭만주의가 그리스 고전문명과 접촉하는 지점은 르네상스와는 다른 것 같다. 낭만주의를 정서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그것을 장악하고 있는 정서는 파토스일텐데 낭만주의는 그리스 고전문명의 보편성이나 이성중심에는 별 친연성이 없지만 역설적으로, 오스만 제국과 동양, 아프리카라는 세계와 대비되는 유럽이라는 동일성의 근원으로 그리스 고전문명에 대한 파토스를 갖는다. 마치 독일사람들이 지크프리트에 대해 갖는 감정처럼. 이는 필시 페르시아 제국이라는 전제국가에 대항해 승리한 자유롭고 민주적인 그리스 도시국가라는 '유럽의 신화'(설령이 이것이 사실일지라도 2천 수백년 후에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민족, 자인종, 자지역 중심의 '신도'들에게 이미 이것은 역사가 아니라 신화다)에서 파생된 것이며 동시에 '전쟁'이라는 가장 격정적인 상황이 이 신도들에게 흥분을 더하게 했으리. 낭만주의 시인이나 화가들이 터어키라는 전제군주에 의해 지배받던 그리스의 독립전쟁에 그토록 열광적으로 호응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하나의 문명은 여러가지 모습으로 자기를 내보인다. 후대의 사람들은 자기가 보고 싶은 부분만을 보게 된다. 그러나 문명은 언제나처럼 그 자리에 놓여 있을 뿐이다.

 

 

                                   

 

                                  

 

 Willow 식당은 이름 그대로 통나무를 소재로 지어졌다. 본건물에서 주변 건물까지 모두 목조건물이다. 돌의 나라에서 만난 목조건물이어서 퍽이나 반갑다. 식당안에 들어서자 이내 마음이 편해지고 아늑해진다. 나무는 돌처럼 육중하지 않아서 위엄은 없어 보일지 몰라도 기대면 어깨를 토닥일 듯한 친근함이 있다.

 

 

                     

 

 라우디케아 교회 (초대 7대교회가 있는 도시)

 

  겨우 일부만이 발굴된 유적 곳곳에 이리저리 나뒹굴듯 흔한 콘포지트(이오니아식과 코린트식 결합된 주두). 폐허 - 문명의 소장성쇠와 인생의 무상이 만나는 곳. 타다토모의 하이쿠가 어울리겠네.

   '이 숯도 한때는 흰 눈이 얹힌 나뭇가지였겠지.'

 

 

 Cotton Castle (면제품 판매점)

 

  파묵칼레로 가는 길에 들른 Cotton Castle. 일행들 중 아가씨와 아줌마들의 눈빛이 반짝반짝 빛나고 남자들의 얼굴은 뚱해졌다. 아니나다를까 우리 동행 셋은 가게 밖에서 어슬렁거리고 아저씨들은 매장안 쇼파에서 지루한 하품을 내뱉고 있었다. 예정시간 30분을 훨씬 넘겨 바리바리 짐을 싸들고 나오는 여성일행들.

  "여자들은 왜 쇼핑을 좋아하는 거지?"

  물었더니 스타 생물강사 빽이 '진화생물학적 관점'에서 즉각 답을 해줬다.

  "옛날 수렵경제시대에 남자들은 사냥을 하고 여자들은 식물들을 채집했잖냐. 사냥은 여럿이서 협동해서 목표가 나타나면 그게 어떤 것이든 가릴 것 없이 일단 잡고 봐야지. 근데 상대적으로 식물 채집은 여유가 있어 이것저것 고르고 관심을 가질 수 있었다는 거야. 이게 체질로 굳었다는 거지."

  버스에 오른 아줌마들이 다시 왁자지껄 해진다.

  "큰일 났어. 남편이 아무 것도 사지 말라고 했는데...... 이만큼이나 사버렸네."

  "나도." "나도."

  윽...

  (이런 일 그뒤로 3번 더 겪었다)

 

 

 

                       

 

                        

 

                        

 

 

 히에로폴리스

 

  면제품 가게에서 시간을 지체해 거대한 폐허 유적인 히에로폴리스는 건성건성 지나치고 말았다. 이곳은 옛날부터 온천으로 유명했다고 한다. 명성에 걸맞게 유적 앞쪽 거대하게 융기한 석회암 절벽 위에도 도랑처럼 바위 사이를 흐르는 온천이 있었다. 발을 담그고 앉아 있자니 보이는 것은 온통 석회암 바위 위를 걸어다니는 무수한 발뿐. 기예와 노동, 지능,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손에 비해 늘 푸대접을 받았던 발이 이곳에서만큼은 드물게 주인공이다. 손이 사람을 만들었다면, 이동수단으로서의 발은 더 근원적인 인간의 동물성을 규정짓는다.

  족욕을 마치고 황제의 치병 방문을 기념해 만들었다는 트리아누스의 문을 들렀다. 문 뒤로 곧게 뻗은 히에로폴리스의 대도 위를 걸었을 발들 - 농민의 발, 상인의 발, 학자의 발, 군대의 발 - 의 걸음소리가 웅성거리며 살아나는 듯 싶었다.

 

 

                      

 

 

 사이프러스 나무

 

  히에로폴리스 어귀에는 떼무덤이 있다. 도시의 유력자들이나, 치료차 이곳 온천을 찾았다가 그만 죽고만 이방의 유력자들의 무덤들이란다. 무덤 주변에는 뾰족한 펜심 같은 모양의 키 큰 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었다. 가이드가 말했다.

  "사이프러스 나무예요. 이곳 사람들은 영혼이 저 나무를 타고 하늘로 올라간다고 믿었대요."

  문득 기억나는 크리스티나 로제티의 싯구.

  아하, 그래서 그 시에 사이프러스 나무가 들어간 거구만. 중학교때 쓰던 연습장 앞표지에 그림과 함께 적혀 있던 시. 거기 쓰인 시어 하나의 의미를 이런데서 다 알게 되네.

 

 

  나 죽거든

 

 

  나 죽거든 사랑하는 이여

  날 위해 슬픈 노랠랑 부르지 마세요

  머리맡엔 장미도 심지 말고

  그늘진 사이프러스 나무도 심지 마세요.

  내 무덤 위는 잔디로 푸르게 하여 주고

  비와 이슬에 젖게 해 주세요.

  당신이 원한다면 기억해 주시고

  잊고 싶으면 잊으세요.

 

  나는 그늘도 보지 못할 거예요,

  비도 느끼지 못할 거구요.

  나이팅게일이 고통스럽게 운다해도

  나는 느끼지 못하겠지요.

  날이 새거나 저무는 일 없는

  희미한 어둠 속에서 꿈꾸며

  아마 나는 기억하겠죠.

  그리고 어쩌면 잊을지도 몰라요.

 

 

 Polat Thermal Hotel

 

  경관을 가리지 못하도록, 이곳에서는 고층건물을 짓지 못하게 한단다. 그래서 이 호텔도 2층에 불과하다. 대신 여러 동으로 면적이 넓었다. 호텔 안의 유황온천에 몸을 담그고 온천수영장에서 수영도 약간 했다. 저녁 먹고 일행중 젊은 친구와 함께 호텔 안 바에 가서 맥주 한잔하는데 마침 10시경부터 간단한 공연을 했다. 밸리댄스와 터키 민속춤 공연. 금발의 밸리 댄서에 취해 동행들 모두 정신 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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