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미술거장전 봤다.
여러 나라 화가들의 작품이 있었지만 눈에 많이 띄었던 것은 플랑드르 화가들의 그림이었다.
얀 피트의 <죽은 사냥감>, 피터르 헨드릭스존 더 호흐의 <어머니의 손길>, 얀 위스튀스존 판 하위쉼의 <꽃과 과일> 등이 기억에 남는다. 베르메르 그림의 어느 한 부분과 닮았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무얼까 생각해 보니, 평면성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든다. 그림의 구체적인 대상을 생략하고 보거나 그림의 한부분만을 떼어놓고 본다면 현대의 추상화처럼 면과 색의 접합을 통해 조형성을 추구하는 요소가 있다.
전시된 그림의 대부분이 바로크풍의 그림이었다.
쭉 보면서 이탈리아 르네상스 그림, 매너리즘 그림과 바로크 시절의 그림에 무슨 차이가 있을까 의문이 들었다. 강렬한 명암, 세밀한 묘사, 풍부한 표현력(그것이 루벤스의 경우처럼 활달한 動勢가 됐든, 브뤼겔처럼 유머러스하거나 다소 기괴하기까지한 행동과 얼굴의 묘사가 됐든, 렘브란트처럼 내면을 읽어내는 진지한 묘사가 되었든 간에), 탁월한 배치에 근거한 빼어난 구성력... 이런 것들이 물론 그 전시대보다 훨씬 복잡하고 다기다양하지만 표현력에서 어떤 근본적인 변화가 이뤄졌다고 하기는 좀 그렇지 않나? 기법적 측면이 아니라면 내용상의 변화는 어떨까? 프랑스, 스페인 등 절대왕정국가들의 요구에 부응한 호화스럽고 권위적인 그림이라고 하면 될까? 루벤스나 벨라스케스라면 모를까, 다른 지역 화가들에게 일률적으로 이 정의를 적용하기는 어렵지 않은가? 거꾸로 17세기 네덜란드의 흥기에 바탕한 도시 부르조아 문화에 기반한 풍속화, 정물화 등의 등장을 변화의 본질적 위치에 놓을 수 있을까? 이 또한 전자의 작품들을 배제하는 결과가 되어 부분적인 의미만 갖게 된다. 결국 타협인가? 절대왕정 자체가 왕을 매개로 한 봉건지주계급과 신흥 부르조아지의 타협의 산물이라는 일반적 이해를 원용한다면 이 양자 문화의 접목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겠지. '바로크(비뚤어진 진주)'를 그 통합의 모순을 드러낸 단어라고 재해석해도 좀 그럴듯 해 보이고.그래도 뭔가 내용과 형식에서 통합적으로 해설이 안되는 찜찜함이... 역시 내 이해의 한계로군.
(물론 일군의 플랑드르 화가의 작품을 바로크 미술의 범주에서 제외할 수도 있겠지만, 바로크가 어느 특정의 미술양식을 대변하면서도 동시에 16세기말에서 18세기초에 이르는 서양미술의 통칭으로 보고 그 시기 회화의 특징을 통합적으로 이해하고자한다면 이런 어려움이 있지 않나 싶은 생각.)
보너스로 서예전시관에 들렸더니 <한얼 이종선>이란 분의 전시회가 있었다.
서예를 보는 눈은 전혀 없음에도 아래 한시를 적은 글씨만은 마음에 들어 적어 왔다.
輕陰閣小雨
深院晝慵開
坐看蒼苔色
欲上人衣來
집에 와서 인터넷을 뒤져보니 왕유(王維)의 시이고 제목은 書事였다. 겸사겸사 그 해석까지 옮겨본다.
서재에서
옛기와에 젖는 가랑비여
깊은 집 낮인데도 더디 열리네
앉아서 푸른 이끼 보자니
그 파란 기운이 옷에 오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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