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들/일상

터어키 11월 26일

멀리가세 2008. 1. 1. 17:34

                       섯째날, 11월 26일 에페소

 

 

 

 울음이 타는 가을강

 

  호텔을 나서 에페소스로 가는 버스 안에서 가이드의 서럽고도 아름다운 사랑이야기 두편을 내리 들었다. 울먹이듯 감정이입에 훌륭했던 화자의 입담에 아줌마 청중들은 눈물까지 흘리시고. 그때 좌우로 끝없이 펼쳐진 목화밭 - 파묵칼레라는 명칭 자체가 목화의 성을 뜻하는 현지어라고 한다 - 이 나왔고 그 사이 사이에 텐트촌이 듬성듬성 서있었다. 목화를 따러 온 쿠르드인들이라고, 수확철에 먼 동부에서 이곳으로 이동해 왔다가 철이 지나면 다시 돌아간다고. 이것으로 쿠르드인들의 수입을 어느정도나마 보장해 줌으로써 터키 정부는 이들의 독립요구를 무마시킨다고 한다. 그래서 기계로 딸 수 있는 목화를 인력으로 대신한다는 역설. 철이 지났음에도 아직 천막을 걷지 못한 가난한 쿠르드족의 임시마을 앞에 어린 소년 둘이 호주머니에 손을 푹 쑤셔 넣고 어깨를 잔뜩 움추린 채 허연 입김을 내뿜고 있었다.

  '저 안에서도 삶이, 사랑이 명멸하고 있으리라, 당연하게도.'

  이렇게 수긍하면서도, 관광버스의 차창 밖으로 본 모습에서 느낀 연민이라는 것이 애초에 자기만족적인 동정에 불과하다는 생각은 도저히 떨쳐 버릴 수 없다. 심해처럼 미동도 없이 물결같은 희비의 감정을 흘려 보낼 수 없을까. 영원히 살 것처럼 잔잔하게 잔혹해질 수는 없는 것일까.

  나는 아직 동해의 긴 여운 속에 갇혀 있다.

  "흑산도라 검은 섬 암벽에 부서지는 작은 파도 없다면 동해바다 너 무엇에 쓰랴" 

  살다가 발 아래 땅이 꺼지고 그 속으로 지중해가 고이는 날이 올까?

 

 

                       

 

                     

 

 에페소스로 가는 길에 Naturel이라는 가죽옷 매장에 들렀다. 이번에도 역시 여성 일행들의 지르기 한판. 묵묵 남자들 여기저기 쿡 박혀 있고, 나는 이 가게 정원이 마음에 들어 오솔길을 걸으며 사진이나 몇방.

 

 

 

 Ephesus

 

 

                        

 

  [크루즈 여행]

  동서양인이 섞인 예사롭지 않은 노인 패키지 여행단이 눈에 들어왔다. 가이드 말에 따르면 크루즈 여행단이라고. 1개월에서 길게는 1년까지 배를 타고 전세계를 돈다고 한다. 1달에 1천만원의 경비가 드는 까닭에 흔히들 그 여행을 '마지막 여행'이라고 한단다. 청장년 시절에는 엄두를 낼 수 없는 여행이기에 늘그막에 모아놓은 돈으로 한번 겁나게 질러 버리는 여행이라는 의미일텐데 그 뒤끝은... 많은 이들이 그 이듬해에는 색다른 여행을 했을런지 모른다. 요단강 크루즈. 돈도 안든다. 그러므로 유람선 출구에도 푸생의 그림에 나오는 이 경구가 있어야 하리.

  '아르카디아, 나 여기에도 있다!'

 

                      

 

                      

 

  [신전]

  살아생전 황제 자신이 자신에게 헌상한 신전이 이곳에는 두 군데나 있다. 도미티아누스 신전과 하드리아누스 신전. 신이 되고 싶었던 황제는 동서고금에 많았다. 황제의 권세로 못할 것이 없었을 테지만 그들조차도 그들의 황궁 앞에서 머리 조아리지 않고 위병의 제지도 받지 않고 버젓이 황제의 침소에 들어오는 이들의 방문은 막을 수 없었으니... 피할 수 없는 경구는 그들의 궁궐문에도 걸려 있다.

  '아르카디아, 나 여기에도 있다!'

 

 

 

                      

 

                     

 

 박해의 문, 성요한 교회(사도 요한 교회)

 

  사도 요한은 12사도 중 막내이자 순교하지 않고 제 명대로 산 유일한 예수의 제자란다. 그는 성모 마리아를 봉양하며 평생을 살다가 에페소에서 삶을 마감했다. 다른 사도처럼 순교하지 못한 것을 내내 괴로워하며. 초대교회에서 많은 이들이 공감했던 정서는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고 이것이 박해에서 기독교가 살아남은 근본적인 힘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사도 요한의 무덤은 네모 반듯한 덮개돌 위로 네개의 기둥이 서있는 모양새다. 그 중 한 기둥과 덮개돌이 맞닿은 틈 사이로 민들레 한 송이가 피어 있었다.

 

 

 

                     

 

 밸리댄스

 

  저녁 8시쯤 다시 이스탄불에 도착한 후 곧바로 모클럽(이름 까먹음)에 가서 밸리댄스 쇼를 봤다. 전설적인 밸리댄서인 아세나를 비롯 4명의 무용수가 나왔다. 온 몸의 살과 근육을 저토록 자유자재로 움직이려면 고도의 수련이 필요하겠다 싶은 당연한 생각과 아울러 가슴과 엉덩이의 흔들림을 가장 선정적으로 보여주려면 나체로 춤을 추는 것이 맞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