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가세 2006. 7. 3. 14:45
 

안개에 대한 기억은 새터에서 시작된다. 밤새워 돌던 원무도 흩어지고 흉금처럼 게워내던 소주의 취기도 어지간히 깰 무렵 새벽의 한기를 타고 북한강의 물안개가 피어 올랐다. 금새 자욱해진 안개는 강 양안에 늘어선 산들의 아랫도리를 지워버렸다. 산들은 섬이 되었다. 섬... 섬을 만드는 안개. 기억은 기형도에게로 흘러 들어갔다.



안개 (기형도)



1


아침 저녁으로 샛강에 자욱이 안개가 낀다.


2


이 읍에 처음 와 본 사람은 누구나

거대한 안개의 강을 거쳐야 한다.

앞서간 일행들이 천천히 지워질 때까지

쓸쓸한 가축들처럼 그들은

그 긴 방죽 위에 서 있어야 한다.

문득 저 홀로 안개의 빈 구멍 속에

갇혀 있음을 느끼고 경악할 때까지.


어떤 날은 두꺼운 공중의 종잇장 위에

노랗고 딱딱한 태양이 걸릴 때까지

안개의 군단(軍團)은 샛강에서 한 발자국도 이동하지 않는다.

출근 길에 늦은 여공들은 깔깔거리며 지나가고

긴 어둠에서 풀려 나는 검고 무뚝뚝한 나무들 사이로

아이들은 느릿느릿 새어 나오는 것이다.

안개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처음 얼마 동안

보행의 경계심을 늦추는 법이 없지만, 곧 남들처럼

안개 속을 이리저리 뚫고 다닌다. 습관이란

참으로 편리한 것이다. 쉽게 안개와 식구가 되고

멀리 송전탑이 희미한 동체를 드러낼 때까지

그들은 미친 듯이 흘러 다닌다.


가끔씩 안개가 끼지 않는 날이면

방죽 위로 걸어가는 얼굴들은 모두 낯설다. 서로를 경계하며

바쁘게 지나가고, 맑고 쓸쓸한 아침들은 그러나

아주 드물다. 이곳은 안개의 성역(聖域)이기 때문이다.

날이 어두워지면 안개는 샛강 위에

한 겹씩 그의 빠른 옷을 벗어 놓는다. 순식간에 공기는

희고 딱딱한 액체로 가득 찬다. 그 속으로

식물들, 공장들이 빨려 들어가고

서너 걸음 앞선 한 사내의 반쪽이 안개에 잘린다.


몇 가지 사소한 사건도 있었다.

한밤중에 여직공 하나가 겁탈당했다.

기숙사와 가까운 곳이었으나 그녀의 입이 막히자

그것으로 끝이었다. 지난 겨울엔

방죽 위에서 취객(醉客) 하나가 얼어 죽었다.

바로 곁을 지난 삼륜차는 그것이

쓰레기 더미인 줄 알았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적인 불행일 뿐, 안개의 탓은 아니다.


안개가 걷히고 정오 가까이

공장의 검은 굴뚝들은 일제히 하늘을 향해

젖은 총신(銃身)을 겨눈다. 상처 입은 몇몇 사내들은

험악한 욕설을 해대며 이 폐수의 고장을 떠나갔지만,

재빨리 사람들의 기억에서 밀려났다. 그 누구도

다시 읍으로 돌아온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3


아침 저녁으로 샛강에 자욱이 안개가 낀다.

안개는 그 읍의 명물이다.

누구나 조금씩은 안개의 주식을 갖고 있다.

여공들의 얼굴은 희고 아름다우며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 모두들 공장으로 간다.





  눈에 콤파스의 쇠심을 대고 안개로 짧아진 가시거리를 반지름으로 삼아 등거리의 모든 점들을 연결하면 하나의 세계가 된다. 누에고치처럼 칩거할 자기만의 섬. 그것이 각자가 배당받은 안개의 주식이리. 대부분의 시간동안 나는 그 주식이 마음에 들었다. 그것을 꼭 움켜쥐고 온종일 객장에 앉아 시세판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것이 삶의 낙이 되어 버렸어. 그러나 간혹, 밑천을 다 털린 친구들은 외투를 챙겨 입으며 내게 말하곤 했다.

  “돌아가야겠어요. 당신도 잘 생각해 봐요. 혹시 모르잖아요? 물안개 속에 가려진 산의 아랫도리들은 서로의 다리를 엮고 있을지.”



 

 

산과 안개 (김완하)



비오는 날 산길 따라 오르다

인적이 드문 산의 뒷편으로 발길을 옮겼다

흠뻑 젖은 오리나무 참나무 어깨마다

물방울을 떨구고 서 있었는데,

안개가 산허리부터 서서히 감아오르는 것을 보았다

산의 정상까지 안개 차오르자

갑자기 산이 기우뚱하는 것을 느꼈다

그때 산이 안개 속에서 살며시

빠져나가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잠시 후 산 아래 계곡에서

콸콸콸 물 쏟아지는 소리 나기 시작하였는데,

그 소리 속으로 산이 들어가

바위처럼 웅크리고 흐느끼는 것을 보았다

물소리 더욱 세차게 바위를 때리며

산의 울음소리 가려주었고

산의 들썩이는 어깨를 감추기 위해

계곡마다 칡넝쿨이 흩어졌는데,

나는 그 물소리에 귀를 빼앗겨

산이 사라진 것조차 알지 못했다

비오는 날이면 산은 잠시 지친 어깨를 허물어

조용히 무너져 계곡에 내려가

물소리에 기대어 울다 올라왔는데

산의 빈 자리 가리는 안개를 보며

사람들는 세상의 찌든 때를 씻었다





  스물스물 한기가 올라오는 계절. 겨울을 날 땔감을 차곡차곡 쟁여 놓고, 겨우내 해야할 일과 읽을거리 등을 적고 있자니 똑똑 누군가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방문을 열어보니 아무도 없고. 잘못 들었나 자리에 앉았더니 금새 다시 문 두드리는 소리. 밖을 내다보면 도무지 사람이란 없고 스물스물 피어 오르는 안개만이-. 몇 번을 속고 나서야 알았다.

  김완하의 안개. 나를 두드리고 있는 것.

 

 

  (1998-9년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