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미사 響尾蛇
향미사 響尾蛇
이원섭
향미사야.
너는 방울을 흔들어라.
원을 그어 내 바퀴를 삥삥 돌면서
요령처럼 너는 방울을 흔들어라.
나는 추겠다. 나의 춤을!
사실 나는 화랑의 후예란다.
장미 가지 대신 넥타이라도 풀러서 손에 늘이고
내가 추는 나의 춤을 나는 보리라.
달밤이다.
끝없는 은모랫벌이다.
풀 한 포기 살지 않는 이 사하라에서
누구를 우리는 기다릴 거냐.
향미사야.
너는 어서 방울을 흔들어라.
달밤이다.
끝없는 은모랫벌이다.
註 향미사는 사하라 사막에 사는 뱀. 가며는 꼬리에서
방울 소리 같은 것이 난다.
(출처: 시집 <향미사> 1958년 문예사)
1. '50년대 시인'하면 나같은 문외한도 딱 떠오르는 말이 있다. 전쟁체험. 그들의 심저에 또아리 틀고 있는 원형적 체험.
소설가 박완서가 어떤 TV 프로그램에 나와 대충 이런 뜻의 말을 했던 것이 기억난다.
"태평양전쟁 당시도 전쟁의 살벌함이 있었지만 그래도 그때는 우리 동포끼리는 같은 편이라는 의식이 있어서 서로 감싸고 하는 정서가 있었다. 그러나 한국전쟁은 우리 내부의 포용을 용납할 수 없는 전쟁이었기 때문에 태평양전쟁 때나 일제시대 때는 기대고 의지하던, 한 동네 사람들까지 서로를 의심하고 두려워했다. 더욱더 심하게 분절의 고통을 겪은 것이다."
전쟁은 끝났고 폐허가 남았다. 폐허는 파괴된 건물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어 주던 길들도 폭격을 맞아 모두 유실되었다.
2. 전쟁은 인간의 이성을 철저하게 배신하지만 동시에 매우 이성적이다. 대량학살을 예를 들자. 전쟁시 상대편의 정규군인 이외의 사람들을 처단하는 것은 보통의 인간이성에 의거하자면 당연히 비이성적 행위이다. 그러나 전시에 자기 편이 진군하거나 퇴각할때 상대편에 가담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구체적인 개개인이 그렇게 될지 안될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렇게 했을 사람이 그 안에 포함되어 있으면 그만이다.)을 대량학살하는 것은 전쟁을 수행하는 자의 입장에서는 매우 '합리적일 수 있는 판단'이다. 후방의 불안요소와 적의 병력보충 요소를 제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성의 모순'이 버젓이 활개치는 공간인 전쟁, 그런 전쟁을 일으킨 이성적 존재로서의 인간.
전쟁은 이성 뒤에 찍히는 의문부호가 된다.
3. 뱀은 서로 다른 두가지 의미를 동시에 상징하는 것 같다. 기독교권에서야 당연히 뱀은 유혹자이며 원죄의 상징이다. 인도문화권에서는 좀 다른 것 같다. <인도의 신화와 예술>(하인리히 침머)이라는 책을 본 적이 있는데 졸려서 별 기억은 안나고 다만 뱀의 왕이, 부처가 득도하고 그 즐거움을 누리는 사흘동안 그를 칭칭 감아 보호했다는 구절은 기억이 난다. 여기서 뱀은 껍질을 벗고 다른 존재로 넘어가는, 죽음과 재생을 상징하는 동물이 된다고 한다.
위의 시도 어찌 보면 두가지 상징이 모두 포함되는 것 같은 생각이 든다.
4. 방울은 무당을 떠올리게 하고 시인의 춤과 연결하면 쉬이 해원의 춤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무당의 춤이 많은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공연'된다는 점에서 집단성이 있다면 시인의 춤은 지극히 개인적이다. 더구나 현재의 시인을 규정하는 통시적, 공시적 좌표는 시인의 춤을 더없이 공허하고 쓸쓸하게 만든다. 시인은 화랑의 후예(통시적 좌표)이며, 지금 사하라(공시적 좌표)에 있다.
5. [화랑의 후예]하니까 김동리의 同名소설이 떠오른다. 이것도 중학교 때인가 읽은 거라 내용은 역시 기억이 나지 않고 단지 그 느낌만 기억나는데 화랑의 후예임을 떠벌리고 다니는 주인공을 몹시 비꼬았던 것 같다. 이 시에서는 과거의 영광을 몰락한 현실에 투영함으로써 현실의 몰락을 더욱 깊이 각인시킨다.
6. 보는 이 하나 없어도 춤을 추겠다는 시인의 의지는 단호하다. 자기 혼자 춤추고, 자기 혼자 본다. 전쟁이 끝났다. 사람과의 유대는 파괴되었다. 이성의 가능성은 대부분 휘발되었다. 더구나 미증유의 사건에 대해 그 원인을 밝히고 죄지은 자를 가려내고 처벌하는, 인간의 마지막 합리적인 행위 공간마저도 전쟁이 끝난 후 오랫동안 설 자리를 잃었다.(어쩌면 현재까지도)
그런 시대에 시인은 어떻게 죽은 자의 원혼을 달래고, 자신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을까?
아무런 유대도 없고 아무런 이성적 근거도 없는 혼자만의 한판 춤, 푸닥거리 밖에. 그나마 그 푸닥거리가 시인의 정신에 작은 도피처를 마련해 준다.
"달밤이다. 끝없는 은모랫벌이다."
풀 한포기 자라지 않는 사막에서...
7. 현실에서 벗어나 도피의 공간을 창출하는 양상은 같은 50년대 시인인 김종삼에게서 더욱 강렬하게 나타나는 것 같다. 강렬하다는 것은, 그의 시에서 폐허의 현실을 드러내지 않은채 고도로 절제된 언어로 도피의 공간을 축조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