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7-8년 됐을까 싶다. 팔 책이 많다고 해서 그의 출판사에 들른 것이. 말이 많고
가벼워 보이긴 했지만 그것이 사람과의 거리를 가깝게 하는 장점이 되기도 하는
성격의 사람이었다. 사무실을 둘러 보다 출입문 위에 붓글씨 액자로 시 한편이
적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 따로 지은이의 이름은 없기에 혹시나 싶어 "저 시,
사장님이 쓰신 겁니까?" 물었더니 대답은 않고 대뜸 그 시를 암송한다.
大地의 詩
먼 땅 잔설이
사위어 간 목덜미여.
지평엔 조으는 눈매
산등성을 넘어오는 기척,
숨죽인 가난도 부리며
보얗게 성글며 온다.
칼끝 같은 생기가 돌아
넘실대는 충동이다.
이미 찍어 놓은
맥을 짚고 오는 소리......
층층이 혼령은 대 내림
머리 풀고 미칠까부다.
그가 팔 책이라는 것은 자신의 출판사에서 발행한 것중 재고가 남은 것이란다.
뜨르르한 중앙일간지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한 시인이 사장님인 출판사라서
뭔가 대단한 것이 걸리겠거니 기대를 했건만 웬걸, 대단한 것은 없고 재미있는
것만 있었다.
방중술 관련된 책들, 풍수비기에 관련된 책들, 일본 퇴마류 소설, 교도소의 여자
사옥을 다룬 야시시한 소설 등등.
적당한 값을 치루고 사왔다.
얼마 안있다 또 치울 책이 있다고 연락이 와서 아버지와 함께 갔는데 그때도 그냥
그런 책을 그냥 그런 값에 주고 사왔다.
그리고 또 얼마 후에 이번에는 다른 출판사 책 치울게 있다며 연락이 왔다. 가서
또 샀다. 2-3달 후에는 대구에 망한 도매상이 있는데 그 책을 처분해 줄 수 있냐는
연락을 받았다. 책을 일단 봐야 했기때문에 아버지께서 그 양반과 함께 대구에 내
려갔다. 몇차례의 거래를 통해 나름대로 친분이 돈독해진 탓에 대구 오가는 기차
안에서 많은 얘기를 나누신 모양이다.
"사장님은 이렇게 다른 사람들 책 거간만 하면 정작 책은 언제 출판하십니까?"
"출판요? 내가 아직 말씀 안드렸나? 우리 망했어요."
(망했다는 말을 이렇게 웃기게 들어본 적은 처음이라는 아버지의 전언이 있었다.)
"..... 그럼, 앞으로 뭘 하실 요량입니까?"
"생각중인데 저도 헌책방을 한번 해볼까 싶어요."
그러고는 헌책방 운영에 대해 이것 저것 물어 보더란다. 아버지는 그간의 친분을
바탕으로 성심성의껏 당신의 경험을 전수해 주셨다고.
대구발 서울행 열차 안에서 오간 두분의 따뜻한 온정이 채 식기도 전인, 그로부터
한달후. 우리 서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떨렁 헌책방이 하나 생겼다. 새로 생긴
책방에 인사 및 탐색차 다녀오신 아버지의 얼굴에 괘씸한 표정이 역력하다. 당근
예의 출판사 사장님이 그 책방 주인이었으니.
이런 인연으로 알게 된 양반인지라 그뒤로 그의 출판사에서 발행한 책들이 들어오
면 자연 눈여겨 보게 되었는데 당연한 거겠지만 애초부터 그가 대중에 영합하는 책
만 출판했던 것은 아니었다. 처자식 먹여살리기라는 굴레가 원죄겠지. 그것을 인정
하고 나면 무엇을 욕할 수 있으며, 한 시인의 행적이 무에 그리 특별한 잘못이 될까.
그도 괴로웠을 것이다.
종(鐘)
끝없이 반추하는 세월 속으로
종루에서 무겁게 가라앉은 종을 올려다 보고
한번 때려치고 싶은 충동을 느끼며
제행무상으로 가는 종을 찔러 본다.
헤어진 연인을 이별해 보내듯이
슬픈 손으로 어느 古寺의 종을 당기듯
안으로만 타는 생명을 연소시켜
흔들어서 풀어본다.
믿을 수 있는 한 사람을 위해
과거 지열과도 같은 사랑을 손질하고
오늘 저녁은
어느 한 사람의 술잔에 술을 가득하게 하여
詩心의 주름살에 숨어있는 사랑을
숨쉬게 할까
떠나가는 사람의 몸에 스민
쓸쓸한 사랑을 위하여
나는 기다리는 사람없는 집으로 돌아오면서
달라붙는 밀회의 귀를 찾듯
잠든 종을 찔러 본다.
생활의 공간에서
퇴근 길엔 중국집에 들러
배갈주를 든다.
목숨은 하늘이고 빛이라고
육체는 죄를 담은 항아리라고
죄를 버리자며 술을 든다.
어쩌다가
창부 웃음같은 웃음을 흘리며
낙엽처럼 굴러가는
큰 활자의 신문 앞에서
우리는 술을 든다.
들어라, 사람은 거짓으로는 살지 못한다.
현실은 늘 현실을 기만하고 부식하는 것
가슴이 답답하면
죠깅을 하거나 낚시하자며 술을 든다.
"놈이나 저놈이나 똑 같은 놈들이다"
허기진 쌍소리로 욕을 하며
술을 든다.
가끔 그의 서점 앞을 지나간다. 자기 삶만큼이나 좁아터진 가게에는 다 놓아둘 수
없는 책들을 인도에 잔뜩 늘어 놓았다. 어느 밤, 해마다 더 늙고 야위어 가는 그가
덩치 큰 책다발을 들여 놓은 것을 차창 밖으로 보고 있었다. 불쑥, 미치지도 못하면
서 늘어만 가는 그의 흰머리에다 대고 욕을 해주고 싶었다.
'어이, 아직도 시는 쓰시는가?'
(연민이고 비아냥이다. 그냥 그렇게 살아 가지고 있는 내 삶에 대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