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들/읽은시

불륜의 빈 좌석 하나

멀리가세 2007. 5. 28. 21:29

밤안개 속에서 
                

                            고재종

 

 

 

그토록 지독한 안개는 내 생전 처음이었다
길 중간에서 좌로 꺾어 대평리로 오르는
그토록 익숙하던 길을 찾지 못하고 헤매다
자전거 전조등에 희부옇게 드러나는 것만 믿고
그만 살얼음 낀 수렁에 빠져버리기도 한 것이다

어떻게 그곳을 빠져나왔는지
이빨 딱딱 마치도록 떨려오는 몸을 겨우 세우고
사방을 둘러봐도 저 어디메쯤 잔등에서 늘 빛나던
외등 하나 글세 보이지 않던 것이다. 하기사
삶이란 그런 꽉 막힘 속에서의 헤매임이라는 걸 종종 느끼기는 했었지

그렇다 해도 그깐 새벽도 가차운 때 안개 때문에
좌로 꺾어야 할 그 길에서 정반대쪽인
우로 꺾어 풍산리 쪽으로 가버렸다는 것은
익숙했던 오감마저도 이미 내 삶의 지향에
어떤 도움을 줄 수 없다는 것의 확인에 지나지 않던 것이다

하기사 전후 한치 밖도 보이지 않는 데서
이렇게 안개 속에 꽉 막혀
이대로 안개 알갱이로 풀려, 그만
안개 속으로 빨려버리는 게 아닌가, 하는데
마침 밤칙간에 가느라 등을 밝힌 풍산리 주막의
그 흐릿한 불빛이 어찌 출구로 보이지 않았겠는가

난데없이 찾아든 손님에게 술국을 데워 내놓는
그 주막댁의 대접만한 젖가오?힐끔대다
그 욕망의 무모함, 그리고 지금껏 믿어왔던
인식의 허망함에 진저리치기도 했던 것인데

아무리 안개가 첩첩으로 짙다지만
정신을 어따 두고 댕기냐던 것이다
오늘밤만 해도 벌써 길 잃고 찾아들었다가
대절택시로 나간 손님이 셋이나 된다던 것이다
저기 대평리와 풍산리 갈림길에선
자동차가 서로 부딪쳐 죽은 자가 발생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주모의 말에 나도 얼른 전화로 택시를 부르려다
아직 창창한 나이에 그래도
내 다리 내 오감 내 인식을 못 믿는다면 어쩌랴,
정녕 안개 짙어도 새벽빛 나면 걷힐 것, 그때까지
이 안개 속 힘껏 헤매보는 것도 괜찮을 성싶어
게슴츠레한 과수댁 눈빛을 박차고 다시 밖으로 나와 걸었었다

그러자 내 눈앞에서, 더는 집 있는 대평리 쪽도
꼭 가 닿아야할 쪽인가 하는 의문과 함께
우선 당장은 내 살아있는 존재 안에서 후끈해오는
그 열기가 몇잔 술 때문은 아닌 것 같아
숨통 조여오는 추위와 안개도 더는 발을 걸어
그 길바닥에 나를 쓰러뜨리지 못하던 것이다 

 

 

 

 


  인간에게 그런 의무는 없다. 연어처럼 제가 태어난 강물로 기어코 되돌아가 생식할 의무
말이다. 누구 말대로 '인간은 자유로 선고' 받았으니까.
  고향은 환상을 주조한다. 어떤 형태로든 그 공간을 이상화할 때.
  신앙의 상실을 우려하는 이들에게, 물질적 삶에 회의하는 사람에게, 개인주의의 발호에 반
대하는 이들에게, 분열된 자아에 혐오를 느끼는 자들에게, 민족적 계급적 압박 하에 놓여 있
는 사람들에게 고향은 에덴의 동산으로, 삶의 원질성(原質性)으로, 공동체의 원형으로, 통합
된 자아의 근본조건으로 '작동'한다.
  이상화된 고향은 그렇게 과거가 아닌 미래가 된다.
  고향을 감춘 안개는 사람을 홀린다. 도깨비에 홀려 밤세워 동구밖만 빙빙 돌다 기진해 죽
은 노인네 짝을 내려고, 부질없이 고향에 집착하는 사람에게 안개는 제 안에 고향이 있다는
듯 사람을 유혹해서 죽을때까지 헤매게 한다.  유혹당하는 이들에게 짙은 안개는 고통이 아
니라 시련이다. 고난에 찬 광야의 40년을 통해 불신을 정화시키고 나서야 가나안에 들어선
이스라엘의 백성처럼 안개와의 대결없이 새벽의 고향을 어찌 맞을 수 있으리. 시련은 고향
의 선결조건인 것이다.  안개는 그 마음을 이용한다. 끊임없이 대결의식을 부추겨 삶을 공전
(空轉)시킨다.
  음험한 안개의 전략을 무산시킬 방도는?
  첫째, 길을 잘못 들었다고 여기지 말 일이다. 고향이 만들어 내는 표상들은 실제가 아니
다. 인간을 강제하는 보편질서(가치)는 없(어졌)으므로 인간은 길을 잘못 들래야 들 수가 없
다. 자신이 가는 곳이 곧 길이다. ('그러자 내 눈앞에서, 더는 집 있는 대평리 쪽도/꼭 가 닿
아야할 쪽인가 하는 의문과 함께')
  둘째, 없는 고향에 대한 유혹에 빠지기 보다는 현실의 유혹에 주목할 일이다. '주막댁의
대접만한 젖가슴', '게슴츠레한 과수댁의 눈빛', '내 살아 있는 존재 안에서 후끈해 오는 그
열기'. 고향이 그토록 배제해왔던 욕망 앞에 자신을 노출하라. 그리하면 '숨통 조여오는 추위
와 안개도 더는 발을 걸어 그 길바닥에 나를 쓰러뜨리지 못하리니.

  고재종은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며 시를 쓰는 농사꾼 시인이다. 여전히 '고향의 가능성'에
천착해 있는 사람인데 그도 때론 이렇게 일탈을 꿈꾸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는
뜻밖이란 의미에서 재미가 있었는데, 곰곰 생각하다보니 오히려 이런 일탈 때문에 그는 계
속해서 고향에 남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묘한 역설에 이르렀다.
  대저 불륜의 빈 좌석 하나 남겨 놓지 않은 버스는 (순교하거나) 자신과 간음하기 마련이
다.

 

* 물론 이 시에서 시인은 어느 한쪽에 치우치는 않는(?) 모습(그 욕망의 무모함, 그리고 지
금껏 믿어왔던/인식의 허망함...)을 보여준다. 90년대 이후를 풍미한 욕망의 담론은 무모하고,
80년대의 이념은 허망하다. 그는 그 중간에, 나쁘게 말하면 어정쩡하게 서 있다. 게슴츠레한
과수댁 눈빛을 박차고 다시 밖으로 나오기는 했으되, 문득 내 살아 있는 존재 안에서 후끈
해 오는 열기가 몇잔 술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챈다. 그 눈치때문에 안개의 발에 걸
려 넘어지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다시 주막으로 들어가지도 못한다. 그는 아직도 그 주막
집 앞에 서 있을 것이다.
  그것을 알면서도 나는 그가 주막으로 돌아간 듯이 썼다. 그 誤讀(오독이 가능하다면)에 대
한 변명은 이것 뿐이다. "시는 작가의 것이 아니라 읽는 이의 것이다."

 

 

 

(2000년. 이전에 학교 동문모임 게시판을 옮기면서 그 이전에 있던 데이터가
모두 날라간줄 알았더니 한 친구가 모두 다운받아 두었다네. 거기서 얻은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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