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들/읽은시

김광석의 노래 같은...

멀리가세 2011. 9. 21. 15:00

어려운 시를 좋아했었다. 혹은 좋아하려고 노력했다.

온갖 비의와 상징이 가득하고, 스치기만 해도 중상이라는 말이 무색치 않은 예리한 표현들이 복병처럼 숨어 있다 방심하는 순간 심장이나 머리를 푹 후비고 들어오는 그런 시. 남들과 구별짓고 싶은 치기였을지도 모르겠고, 지적 우월감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현실을 통속적으로(직설적으로?) 진술하는 것보다 비틀고 꼬아서 표현하는 것이 현실을 더 근본적으로 이해하는 길이라고 믿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요 2-3년 부쩍 나이를 먹었다. 나의 특징이었던 강력한 마름모 턱선도 살이 찐 덕에 옛날의 날카로운 각(角)을 잃었다. 배도 나오고 어깨도 둥그스름해졌다. 처자식이 생기고 이쪽 저쪽 부모님들은 병들고 늙어간다. 위아래로 모두 부양해야 할 대상들만 늘어나고 있다.

그럼에도 아직 미련처럼 시를 쥐고 있다면 꽉 붙잡아도 손 베지 않을 이런 시들만이 손아귀에 남으리.

 

 

 

가정

 

                         박목월

 

 

지상에는

아홉 켤레의 신발.

아니 현관에는 아니 들깐에는

아니 어느 시인의 가정에는

알 전등이 켜질 무렵을

문수(文數)가 다른 아홉 켤레의 신발을.

 

내 신발은

십구문반(十九文半).

눈과 얼음의 길을 걸어

그들 옆에 벗으면

육문삼(六文三)의 코가 납짝한

귀염둥아 귀염둥아

우리 막내둥아.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얼음과 눈으로 벽을 짜올린

여기는

지상.

연민한 삶의 길이여.

내 신발은 십구문반(十九文半).

 

아랫목에 모인

아홉 마리의 강아지야

강아지 같은 것들아.

굴욕과 굶주림과 추운 길을 걸어

내가 왔다.

아버지가 왔다.

아니 십구문반(十九文半)의 신발이 왔다.

아니 지상에는

아버지라는 어설픈 것이

존재한다.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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