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상치 못했던 죽음에 대한 나의 반응은 적어도 이제까지는, 놀라움이 대부분이었고 거기에 안타까움이 조금 보태지는 것뿐이었다.
'대학 다닐때 아무리 가깝게 지냈다고 하더라도 학교 졸업한 뒤로 어언 20년이 다되는 동안 그를 만난 것은 다섯 손가락으로 다 꼽을 수 있을 정도였다. 마지막으로 본 것도 벌써 5년이 다 되어간다. 이런 상황만을 놓고 보면 와룡 형의 죽음 역시 대부분의 놀라움과 약간의 안타까움이라는 일반적 감정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날 까닭이 없어 보이건만 알 수 없이 무거운 이 느낌은 무엇인가?'
와룡의 부고를 접하고 처음 든 생각은 그랬다.
부고 문자가 온 발신번호를 되짚어 걸어 사인이 무어냐고 물어보았다. 그 역시 갑작스런 소식이라 자세한 병명이나 사인은 모르고 그저 지병이 있었다고만 들었단다. 그래 이미 소식 끊긴지가 몇년인데 그 사이에 어떤 일인들 안생기랴. 큰병 걸려 몇달 앓다 죽은 거겠지. 꼿꼿한 성격에 우리들한테는 구차한 소식 전할 맘도 없었던 거고.
저녁 무렵 몇몇이 서울역에 모여 빈소가 마련된 부산의 한 병원으로 향했다. 밤 10시 무렵 도착한 장례식장. 상가집이 맞는지 의심스러우리만치 썰렁한 장례식장에서 조문객을 맞은 이들은 와룡의 형과, 그날 처음본 와룡의 아들. 이제 중학교 2학년이라는 아들은 낯설은 상황을 감내하기 어려워하는 눈빛이 역력했다.
문상을 마치고 와룡의 형님과, 와룡의 부인, 그리고 먼저 와있던 친구들에게서 들은 이야기중 와룡의 죽음에 대한 객관적인 사실들은 이랬다.
* 얼마전 와룡이 일하던 직장에서 몸이 아프다며 조퇴를 했다.
* 며칠이 지나도 출근하지 않고 연락도 안되자 동료들이 형이 기거하던 쪽방에 찾아갔지만 문이 잠긴채
기척이 없어 그냥 되돌아 왔다.
* 그뒤로 또 며칠이 지나도 소식이 없어 다시 찾아 갔더니 안에서 냄새가 나서 열쇠공을 불러 문을 따고
들어갔다. 형은 이미 사망한 상태였고 시신의 부패가 많이 진행되어 있었다.
* 경찰의 부검결과 간염에서 진행된 간암이 사인이고 최종 사망일자는 10월 14일로 이미 열흘 전이었다.
* 다른 특별한 유품은 없고 옷장안에 5백 38만원이 현금으로 남겨져 있었다.
* 핸드폰에 직계가족들의 연락처가 전혀 저장되어 있지 않아 경찰들이 지문을 조회해서 와룡 형의 부인에
게 연락했다.
* 형은 5년전 부산에서 일한다고 나간후 담양에 있던 형수는 물론 본가 사람들에게도 일체 소식을 전하지
않고 혼자 살았다. 형수에게도 이 부고가 5년만의 첫소식이었단다.
술 몇 잔을 마시고 앉아 있자니 주위 사람들의 이야기는 도통 집중이 되지 않아 환청처럼 웅웅거리기만 하고 건성건성 응대는 하고 있었지만 머리 속은 딴 생각으로 가득했다.
돌이켜 보면 와룡은 늘 그런 식이었던 것 같다. 그는 사람들에게 곁을 주지 않는다. 오랫동안 잘 알고 지냈고 심지어 몇년동안은 매일같이 붙어 있었음에도 그는 자신의 속내를 얘기하지 않았다. 생각거리가 있으면 혼자서 고민하다가 어느순간 주변사람에게 자신이 내린 결론만을 말하고 그 결론을 후딱 행동에 옮긴다. 주변과 소통하는 중간과정이 없다. 어떤 고민이 있고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차 한잔 마시면서 언뜻언뜻 의중을 내비치든가, 술자리에서 술기운에 못이긴 척 털어 놓거나, 하다못해 지나가는 말로라도 언질을 주는 법이 없었다. 그러니 나중에 결론만을 듣는 사람들은 항상 뜬금없이 놀랄 밖에...
1991년인가 92년인가 갑자기 건대앞에 있는 중국집에 모이라는 선배들의 전언이 있어 가보니 와룡의 환송회였다. 학교생활을 접고 노동운동하러 간댄다. 물론 선배들 몇몇은 우리보다는 먼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불과 며칠 상관이었다. 그 술자리에서 언제 결정난 거냐고 물었다. 이런저런 근거를 주섬주섬 들이댔지만 잘 기억은 안나고 결론은 얼마전에 자취방에서 번쩍 이젠 떠날때가 됐구나하고 느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몇년이 지났다. 뭔일 때문인지는 몰라도 서울에 올라온 와룡이 오랫만에 사람들을 불러냈다. 사는 얘기가 오가다 현장에 내려가기 전에 청주(대전이었던가?)에서 무슨 아르바이트를 하던 얘기가 나왔다. 거기서 몇달을 일하다 몸살이 나서 며칠을 자취방에서 죽도록 앓았다고 한다. 그리고 나서 결심을 했단다. 이제 현장에 내려갈 때가 됐다고.
학교 다닐 적에 운동권 내에서 할일을 정할 때도, 결혼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느닷없이 증산도에서 일 본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의아하긴 했지만 솔직히 그닥 놀라지는 않았던 것 같다. 예전에도 그랬으니까.
형의 이런 성격을 떠올리고 있자니 이번에도 이 양반 또 그렇게 행동한 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업에 실패한 후 증산도 일도 여의치 않고 형편이 어려워지자 가족을 처가에 남겨 두고 혼자 부산에서 재기해 보려고 한 것 아닐까? 가족들과 함께 있으면 돈도 모으기 어려울 뿐더러 일 이외에도 신경써야 할 일도 많아지니 괴로워도 한동안은 연락 딱 끊고 떨어져 있다 재기한 후 다시 만나는 것이 유리하다 판단할 수도 있었을 것 같다. 형이라면... 그러나 뜻대로 자리를 잡지 못하고 몇해 지나가면서 몸의 이상을 발견했던 것 아닐까? 병든 몸으로 가족에게 돌아가는 것이 의미하는 것은 가족에게 도움을 주기는 커녕 스스로가 커다란 짐이 되는 것이었을터... 어떻게 되든 그 자리에서 홀로 버티는 것이 최선이라고 형은 판단한 것이 아닐까. 그렇게 버티다 어느날 결국 마지막날이 오고 만 것 아닐까? 장례비로 쓰라고 현금 538만원을 남겨 놓고... 죽음을 직감하지 못할 만큼 그는 둔감한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절래절래 머리를 흔들었다.
아니, 내가 지금 뭐하는 거냐. 쓸데없이 남의 삶과 죽음을 재단하고 있다니...
모든 것은 그저 추측일뿐 상중의 형수에게 저간의 사정을 꼬치꼬치 캐물어 볼 계제도 아니었고 설령 어떤 얘기를 들었다 한들 형을 둘러싼 1-20년간의 상황과 그에 따른 심리적 변화를 내가 겪었던 과거의 몇가지 경험과 방금 들은 이야기만을 토대로 유추한다는 것은 억측이다.
억측... 그래 억측. 왜 머리를 굴리니? 들은대로 무슨 사정상 부산에서 병 걸린 것도 모르고 혼자서 열심히 일하다가 어느날 갑자기 몸이 안좋아 조퇴를 하고 쉬고 있는데 급작스레 병세가 악화돼 손 쓸 도리도 없이 최후를 맞은 거야. 그저 그렇게 우연이라고. 내 불길한 추측처럼 처절하고 외롭게 죽음을 감당한 것이 아니라니까.
그러나 이렇게 바라면서도 가슴 한 구석에서 여전히 또아리 틀고 꿈쩍하지 않는 이 무거운 느낌은 무어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