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솔가
김혜순
죽은 어머니가 내게 와서
신발 좀 빌어달라 그러며는요
신발을 벗었더랬죠
죽은 어머니가 내게 와서
부축해다오 발이 없어서 그러며는요
두 발을 벗었더랬죠
죽은 어머니가 내게 와서
빌어달라 빌어달라 그러며는요
가슴까지 벗었더랬죠
하늘엔 산이 뜨고 길이 뜨고요
아무도 없는 곳에
둥그런 달이 두 개 뜨고 있었죠
1. 김현은 그의 유고일기 <행복한 책읽기>에 위 시를 인용해 놓고 몇 가지 의문을 던져 두었다.
- 이 시는 불가능한 일들로 이루어져 있다.
- 누구나 보는 하늘엔 산과 길이 떠 있는데, 왜 아무도 없는 곳엔 둥그런 달만 두 개 떠 있을까?
- 그 시에 시인은 도솔가라는 옛이름을 붙인다. 그것은 무슨 이유때문일까?
- 이 시를 읽으면 서유석의 타박네가 생각난다. 그 이유도 모르겠다.
2. 삼국유사에 실린 <도솔가> 관련기사의 요지는 이렇다.
경덕왕 19년 두 개의 해가 떠서 10여일간 없어지지 않자 왕은 일관의 말을 듣고 우연히 만난 월명사로 하여금 향가를 지어 부르도록 했다.
오늘 이에 산화의 노래 불러
뿌리온 꽃아, 너는
곧은 마음의 명을 심부름하옵기에
미륵좌주를 모셔라
이 <도솔가>를 부르자 곧 ‘두 해의 괴변’이 사라졌다.
나는 이 기사를 읽으면서 “왕자의 난”을 떠올렸다. 그리고 반란은 왕자에게 미래의 왕좌를 보장함으로써 종결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왜? 이 시의 마지막 행 미륵좌주를 모셔라 때문에. 미륵좌주(미륵불)은 도솔천(미륵정토)의 보주로 석존 입멸 후 57억 7천년 후에 나타나 모든 중생을 구제한다는 미래의 부처이다.
아무튼 태양이 두 개 뜬 것은 재앙이다. 아버지와 아들, 남자와 남자. 하늘 아래 두 개의 태양은 있을 수 없는 법이니 어느 한쪽은 제거되어야 한다. 상극이다. 이것이 남성의 도솔가이다. 반면 김혜순의 <도솔가>에서 두 달은 사이좋게 나란히 뜬다. 어머니와 딸, 여자와 여자. 무엇인지 모를 아픔을 ‘공유’한다.
똑같은 제목을 붙였지만 시인은 시의 본질적 내용을 바꿈으로써 새로운 ‘여성의 도솔가’를 쓰고 싶었던 것이리라.
3. 정석가(鄭石歌)
지은이 모름/이상보 옮김
무쇠로 큰 소를 지어다가
무쇠로 큰 소를 지어다가
쇠나무 산에 놓습니다.
그 소가 쇠풀을 다 먹어야,
그 소가 쇠풀을 다 먹어야,
유덕(有德)하신 임 여의어지이다.
구슬이 바위에 떨어진들,
구슬이 바위에 떨어진들,
끈이야 끊어지리까.
즈믄 해를 헤어져 살아간들,
즈믄 해를 헤어져 살아간들,
믿음이야 끊어지리까.
4. 어머니는 절박하게 ‘어딘가’로 가려고 한다. 그러나 갈 수가 없다.
신이 없어서일까? 발이 없어서일까? 하나씩 하나씩 딸에게 빌려 보지만 모두 여의치 않다. 어찌나 다급했으면 종국에는 ‘가는 것’과 무관한 가슴까지 빌린다.
고등학교 때 <정석가>에서 배운대로 불가능한 상황의 설정은 강렬한 의지의 다른 표현이다. 김혜순은 이 원리를 두 번 변형시켜 더욱 강력한 효과를 얻고 있다.
첫째, 불가능한 상황을 어머니 혼자 감내하는 것이 아니라 딸에게 전가하고 있다. 또한 딸은 이 불가능성을 회피하지 않고 어머니가 ‘그 어딘가’에 갈 수만 있다면 기꺼이 감내하고자 한다. 이 지점에서 어머니가 어딘가로 가는 문제가 단지 어머니만의 문제가 아닌 ‘어머니와 딸(모든 여성)’의 문제로 묶여내지고 있다.
둘째, 딸이 자신에게 전가된 그 불가능한 요구를 모두 수행한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그 어딘가’에 도달하지 못한다. 이는 두 사람의 좌절감을 극도로 심화시키는 효과를 낳는다.
5. 죽은 어머니가 가고자 하는 곳은 어디였을까?
죽은 자이니, 서쪽으로 난 ‘길’을 걸어 걸어 십만억토를 지나면 나온다는 서방정토겠지. 아니면 수미산을 오르고 오르다 보면 나온다는 미륵정토겠지.
그러나 산과 길은 저 멀리 하늘에 떠 있다. 굳이 음양오행설을 끌어들이지 않아도 ‘하늘’은 남성의 공간이며 그와 연관되는 산,길,정토도 모두 남성들의 차지이다. 애시당초 어머니(여자)에겐 허용되지 않은 공간이다.
6. <영광 따박네>
따박따박 따박네야 너 어디로 뭣허로 가냐 우리 엄마 무덤에로 젖 먹으러 내가 가네. 산 높어서 어찌 갈래 산 높으면 기어 가고 물 짚어서 어찌 가랠 물 짚으면 히어(헤엄쳐) 가지. 우리 엄마 묏에 가니 개꽃도 너울너울 참꽃도 너울너울 그놈 하나 따먹응께 우리 엄마 젖 맛일레 당기둥당에 둥당에다.
* 타박네(따박네, 따복네, 따북년 등)는 엄마 잃은 여자아이의 노래이다.
‘죽은’ 엄마와 ‘잃어 버린’ 딸. 가부장제 하에서 여성은 태어나면서부터 주체적 존재에 포함되지 않는다. 죽는 것과 잃어 버린다는 것은 주체적 존재의 외부에 있다는 의미에서 동일하다. 동시에 어머니와 딸의 관계는 세대적 연결성을 부여함으로써 버려진 존재의 지속성(역사성)을 각인시킨다. 단일세대의 일시적 차별이 아니라는 것이다.
김혜순의 <도솔가>에서도 어머니와 딸은 죽고 버려진 존재이다. 비록 본문에 그들의 상황을 알려주는 낱말이 하나도 없지만 3연까지 계속되는 절박한 행위의 반복은 그들의 처지를 암시한다.
7. <아무도 없는 곳에/둥그런 달이 두 개 뜨고 있었죠>
이 시의 마지막 연에서는 두가지의 이미지가 겹친다.
7-1. 어머니와 딸은 아무리 노력해도 주체의 공간에 갈 수 없다. 그 사실을 알았을 때 어머니와 딸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스스로 자신들만의 공간(아무도 없는 곳)을 만드는 일이고 그 안에서 스스로 떠오르는 일이다.
7-2. 산과 길은 수직적이든 수평적이든 공간을 잇대어 연장시킨다. 단계적이고 자연스러운 이동이랄까. 반면 아무도 없는 곳에 뜬 둥근달 두 개는 하나의 상태가 다른 상태로 중간과정 없이 비약해 버리는 ‘초월의 구멍’을 연상시킨다.
8. 김현은 그 날짜 일기의 맨 마지막을 이렇게 맺는다.
“슬프면서 유장하다.
* 김현의 유고일기를 통해 김혜순의 <도솔가>를 만난 것이 올초였다. 그 후로 여러달 동안 김현의 의문을 나 또한 품고 있었는데 우연찮게 <문학동네 2000년 봄호>를 입수, 거기에 실린 김혜순의 산문 <연인, 환자, 시인, 그리고 너>를 읽었다. 그 산문은 시인이 11년전에 쓴 시에 대한 해설 같았다. 의문이 풀렸다.
비록 지금은 “버려진 존재”의 자리에 “바리데기”를, “아무도 없는 곳”의 자리에 “서천서역국”을 변주해 놓았지만 <버려짐>과 <공간>(여성 자신의 욕망을 무대화할 공간, 현실공간의 균열내에서 여성이 품어내는 죽음의 공간)이라는 두 개의 화두는 여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2000년-2001년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