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들/끄적여본시

추억을 추억한 추억 밖에

멀리가세 2006. 9. 22. 21:21

추억을 추억한 추억 밖에

 

 


내 배에 밤새 얹혀진 아내의 허벅지를,

붙박이별 박부장이 행성들에게 쏟아내는 타박 소리를,

화구(畵具)를 들고가는 브뤼겔의 어깨를,

3박 4일 동숙(同宿)한 여행에서도 끝내 몸 섞지 않았던 여자의 눈빛을,

커피에 찍어 먹는 참크래커의 맛을 알려준 첫사랑의 부친의 부음을,

원각사지 십층석탑을 돌며 도에 관심 있으신가요 묻는 아가씨의 겨드랑이를,

남성휴게실에서 나오는 스님의 바랑을,

두발자국 앞서 걷는 뇌성마비 소녀의 궤도 모를 팔짓을

튿고 나와서

퇴근길 지하철 옆자리에 앉아서

내 머리에 빨대를 꽂아 쪽쪽 빨아 먹으면서

훌적훌적 커져서

성수대교를 지날때 쯤 나를 구겨 한강에 던져버리고는

태연히 밭을 가는.


가을엔 추억이 없다,

추억을 추억한 추억 밖에.

 

 

 

 

 

* 곰곰히 생각해 보니 가을에는 머리에 콱 박히는 추억거리가 별로 없다. 적어도 나에게는. 누구나 그렇듯 가을에는, 외로움이라고 해도 좋고 적막함이라고 해도 좋고, 공허함이라고 해도 좋을, 아무튼 무언가-그것이 연인의 부재든, 생의 목표의 부재든, 일년내 뭐 하나 제대로 이룬 것 없어 보이는 실망감이든, 짐승이었던 시절 유전자에 내장된 다가올 겨울잠을 위해 눈떠 있는 시간을 마무리해야 되는 아쉬움이든- 비어 있는 느낌이 뭉글뭉글 부풀어 오르고 그 공허함은 옛 봄, 옛 여름, 옛 겨울의 기억을 고구마 줄기처럼 줄줄이 캐어 내오지. 무언가 옆.에.있.었.으.면. (지금 옆에 있는 것만 빼고)  생각이 들면  반복되는 일상의 지겨움도 덩달아 임계점에 도달한다. 그러나 그것도 일순, 일상의 힘은 워낙에 막강해서 그런 감정도 <이카루스의 추락>처럼 우리들 마음 속의 소용돌이에 그칠뿐 나를 포함한 일상은 또 그대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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