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들/느낀생각

귀뚜라미

멀리가세 2007. 9. 10. 21:17

  귀뚜라미 한마리가 책방 바닥을 기어간다. 제대로 튀지 못하는 걸로 봐서 죽을

때가 다 된 놈 같다. 불쌍해서 풀 있는 곳으로나 갖다 주려고 뒤꽁무니를 잡았더

니 이놈이 해꼬지하려는 줄 알고 몸을 튀어 올렸다가 그만 뒷다리가 하나 쑥 빠

져버렸네.

  '거참, 디따 싱겁게 빠지네.'

  싱겁게...?

  곰곰 생각해 보니 내가 보기엔 별거 아닐지 몰라도 이놈은 안죽을라고 지 다리가

빠질만큼 필사적으로 뛰어 올랐던 것이리. 남은 다리로 기울뚱기울뚱 어디론가 걸

어가는 귀뚜라미.

  절라 미안해졌다.

 

  며칠 상관으로 계절이 바뀌었다.

  아침저녁으로는 제법 서늘하기까지 한 가을바람이 슬며시 내 뒷다리를 잡는다.

 

 

 

 

[여자가]

 

 

가을에는

                         - 최영미

 

 

내가 그를 사랑한 것도 아닌데

미칠 듯 그리워질 때가 있다

바람의 손으로 가지런히 풀어 놓은, 뭉게구름도 아니다

양떼구름도 새털구름도 아니다

아무 모양도 만들지 못하고 이리저리 찢어지는 구름을 보노라면

내가 그를 그리워한 것도 아닌데

그가 내 속에 들어온다

뭉게뭉게 피어나 양떼처럼 모여

새털처럼 가지런히 접히진 않더라도

유리창에 우연히 편집된 가을 하늘처럼

한 남자의 전부가 가슴에 뭉클 박힐 때가 있다

무작정 눈물이 날 때가 있다

가을에는, 오늘처럼 곱고 투명한 가을에는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표정으로 문턱을 넘어와

엉금엉금, 그가 내 곁에 앉는다

그럴 때면 그만 허락하고 싶다

사랑이 아니라도, 그 곁에 키를 낮춰 눕고 싶다

 

 

 

[남자가]

 

 

멧새 앉았다 날아간 나뭇가지같이

                                    - 장석남

 

 

내 작은 열예닐곱 고등학생 시절 처음으로 이제 겨우

막 첫 꽃 피는 오이 넝쿨만한  여학생에게  마음의 닷

마지기 땅을 빼앗기어 허둥거리며 다닌 적이 있었다.

어쩌다 말도 없이 그 앨 만나면 내 안에 작대기로 버

티어 놓은 허공이 바르르르르 떨리곤 하였는데

서른 넘어  이곳 한적한,  한적한 곳에 와서 그래도는

차분해진 시선을 한올씩 가다듬고 있는데 눈길 곁으

로 포르르르 멧새가 날았다.

이마 위로, 외따로 뻗은, 멧새가 앉았다 간 저, 흔들리

는 나뭇가지가, 차마 아주 멈추기는 싫어 끝내는 자기

속으로 불러 들여 속으로 흔들리는 저것이 그때의 내

마음은 아니었을까.

외따로 뻗어서 가늘디가늘은,  지금도 여전히 가늘게

는 흔들리어 가끔 만나지는  가슴 밝은 여자들에게는

한없이 휘어지고 싶은  저 저 저 저 심사가 여전히 내

마음은 아닐까.

아주 꺾어지진 않을 만큼만 바람아,

이 위에 앉아라 앉아라.

어디까지 가는 바람이냐.

영혼은 저 멧새 앉았다 날아간 나뭇가지같이

가늘게 떨어서 바람아

어여 이 위에 앉아라.

앉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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