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뚜라미 한마리가 책방 바닥을 기어간다. 제대로 튀지 못하는 걸로 봐서 죽을
때가 다 된 놈 같다. 불쌍해서 풀 있는 곳으로나 갖다 주려고 뒤꽁무니를 잡았더
니 이놈이 해꼬지하려는 줄 알고 몸을 튀어 올렸다가 그만 뒷다리가 하나 쑥 빠
져버렸네.
'거참, 디따 싱겁게 빠지네.'
싱겁게...?
곰곰 생각해 보니 내가 보기엔 별거 아닐지 몰라도 이놈은 안죽을라고 지 다리가
빠질만큼 필사적으로 뛰어 올랐던 것이리. 남은 다리로 기울뚱기울뚱 어디론가 걸
어가는 귀뚜라미.
절라 미안해졌다.
며칠 상관으로 계절이 바뀌었다.
아침저녁으로는 제법 서늘하기까지 한 가을바람이 슬며시 내 뒷다리를 잡는다.
[여자가]
가을에는
- 최영미
내가 그를 사랑한 것도 아닌데
미칠 듯 그리워질 때가 있다
바람의 손으로 가지런히 풀어 놓은, 뭉게구름도 아니다
양떼구름도 새털구름도 아니다
아무 모양도 만들지 못하고 이리저리 찢어지는 구름을 보노라면
내가 그를 그리워한 것도 아닌데
그가 내 속에 들어온다
뭉게뭉게 피어나 양떼처럼 모여
새털처럼 가지런히 접히진 않더라도
유리창에 우연히 편집된 가을 하늘처럼
한 남자의 전부가 가슴에 뭉클 박힐 때가 있다
무작정 눈물이 날 때가 있다
가을에는, 오늘처럼 곱고 투명한 가을에는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표정으로 문턱을 넘어와
엉금엉금, 그가 내 곁에 앉는다
그럴 때면 그만 허락하고 싶다
사랑이 아니라도, 그 곁에 키를 낮춰 눕고 싶다
[남자가]
멧새 앉았다 날아간 나뭇가지같이
- 장석남
내 작은 열예닐곱 고등학생 시절 처음으로 이제 겨우
막 첫 꽃 피는 오이 넝쿨만한 여학생에게 마음의 닷
마지기 땅을 빼앗기어 허둥거리며 다닌 적이 있었다.
어쩌다 말도 없이 그 앨 만나면 내 안에 작대기로 버
티어 놓은 허공이 바르르르르 떨리곤 하였는데
서른 넘어 이곳 한적한, 한적한 곳에 와서 그래도는
차분해진 시선을 한올씩 가다듬고 있는데 눈길 곁으
로 포르르르 멧새가 날았다.
이마 위로, 외따로 뻗은, 멧새가 앉았다 간 저, 흔들리
는 나뭇가지가, 차마 아주 멈추기는 싫어 끝내는 자기
속으로 불러 들여 속으로 흔들리는 저것이 그때의 내
마음은 아니었을까.
외따로 뻗어서 가늘디가늘은, 지금도 여전히 가늘게
는 흔들리어 가끔 만나지는 가슴 밝은 여자들에게는
한없이 휘어지고 싶은 저 저 저 저 심사가 여전히 내
마음은 아닐까.
아주 꺾어지진 않을 만큼만 바람아,
이 위에 앉아라 앉아라.
어디까지 가는 바람이냐.
영혼은 저 멧새 앉았다 날아간 나뭇가지같이
가늘게 떨어서 바람아
어여 이 위에 앉아라.
앉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