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수(宇宙樹)는 땅에서 하늘까지 뻗은 신성한 나무다. 땅이 현실이고 하늘은 진리일 테니 이 나무가 하는 일은 정해진 거다. 우주적 진리를 소통시키지는 거겠지. 주변에 비해 도드라지게 큰 나무들이, 옛날 우리나라 동네 어귀에 많았던 솟대들이 따지고 보면 다 그 대용들이었다. 새는 그 높은 나무 위에서 다시 하늘로 비상하고 사람과 하늘이 자유로이 오가던 시절 천신들은 그 나무를 딛고 하늘로 올라갔겠지. 그렇게 위아래도 길쭉한 것은 하늘을 지향한다. 거기서 느껴지는 정서는 성스러움, 경외, 순수함 등이다.
모딜리아니의 그림을 보다가 루오가 떠올랐다. 다시 루오의 도록을 뒤져 베로니카나 성안(聖顔) 등의 그림을 꼼꼼히 보자니, 다르다. 양자의 그림 모두에서 수직성의 정서는 공통되지만 루오의 것이 '현실로 재투영되는 초월성'인 반면 모딜리아니의 것은 '현실을 견딜 수 없는 섬약한 망연함'이다.
추악한 현실 속에 내동댕이쳐진 순수한 영혼들 대개는 나이 먹어가며 현실과 타협해 자신도 적당히 추악해진다. 간혹은 종교에 의탁해 순수성을 견지하고자 한다. 내가 괴로운 것은 현실의 추악성 때문만이 아니다. 나 자신에게도 그 추악함이 내장되어 있으며 자력으로는 그 추악성을 씻어낼 수 없다는 것이 어쩌면 더 괴로운 일이다. 이때 신이 등장한다. 절대선으로서 신에게 의탁함으로써 구원을 확인하고, 오염된 영혼을 정화하는 기간으로 삶이 설정된다. 즉, 초월적 존재에 의해 삶이 재규정된다. 그러나 초월적 존재를 상정할 수도, 현실에 적당히 적응할 수도 없는 사람들도 어쩌다 있기 마련인데 이런 사람들은 곧잘 죽음을 택한다.
굵고 곧은 윤곽선, 진리 앞에 순결했으나 그 순결을 무기로 나약한 이들을 겁박하지 않고 포용할 듯 싶은 저 검고 또렷한 눈망울, 그리고 두터운 마티에르로 캔버스에 단단히 고착된 루오의 그림은 더없이 견고하다. 그는 제명대로 살다 죽었다.
가는 윤곽선, 망연하거나 아예 눈동자가 없는 눈 속에 고여있는 심연의 애수, 흐르듯 여린 곡선이 부유하듯 떠있는 모딜리아니의 그림은 하늘까지 뻗을 힘이 없다. 자살은 아니어도 마약과 술에 쩔은 모딜리아니의 요절과 닮았다.
모딜리아니, <황색 쉐터>
모딜리아니, <민중의 딸 마리>
루오, <성안>
루오, <베로니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