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9월이었던가 처가집에 갔더니 못보던 개 한 마리가 있었다. 새끼 티는 벗었지만 성견이 되려면 한 반년은 더 있어야 할 것 같았다. 화천에 사는 처 이모님께서 가져다 놓으셨단다. 이미 기르는 놈 두 마리도 귀찮은데 괜히 일손만 더 잡아먹게 생겼다고 장모님은 처음부터 그다지 달갑지않아 하셨다는데 거기다 이놈 성격도 사나워 밥주러 간 장모님 손을 물기까지 했다니 이 녀석의 팔자가 그리 순탄하지 못하리란 것은 자못 자명한 일에 가까웠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두어주 후에 또 처가집에 갔더니 그놈의 운명이 결정되어 있었다. 개를 주신 화천 이모님 두째 아들 되시는 분, 그러니까 장모님에게로 조카 되시는 양반이 얼마전 들렀다가 그놈을 보고 좀더 크면 개소주를 내릴라는데 이모님 잘 좀 길러주소 하더란다. 장모님 바로 OK. 그렇게 백구(흰놈이라 그냥 성의없이 붙인 그놈 이름)는 몇달 안남은 시한부 인생을 살게 된 것이었다.
내가 보기에 백구 이 녀석, 다리도 길쭉길쭉하고 생긴 것도 잘 생긴 것이 족보 있는 개 순종까지는 아니어도 그 피라도 어지간히 받은 놈인듯 싶은데 창졸간에 황천길을 받아 놓았다니 좀 안돼 보여 가기 전에 먹기라도 잘 먹고 가라고 처가집에 갈 적마다 마트에서 파는 2900원짜리 밀가루 쏘세지 - 디따 크다. 오뉴월 쇠불알을 다시 한번 잡아 늘인 크기쯤 되지 않을까? - 를 사다가 보시를 했던 것이었다. 개들이 다른 건 기억 못해도 두가지는 기억한다는데 하나는 자기 팬 놈, 다른 하나는 먹이 준 놈이란다. 사납던 백구 녀석도 갈 적마다 '그 맛난 쏘세지'를 주니까 어느 새인가 이놈이 나를 보면 꼬리를 치더니 급기야 멀리서 내 차 소리만 나도 컹컹거리며 존앤 반가워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어쩌랴, 니 팔자는 이미 정해졌는 걸... 가기 전에 쏘세지나 마이 묵고 가라ㅠㅠ.
세월은 흘러흘러 백구는 어느덧 성견이 다 되었고 개소주를 내리든 보신탕을 끓이든 제대로 근수가 나오게 되었다. 다행인 것은 화천 이모님 자제되시는 양반이 저간의 사정으로다 장모님 댁에 오는 일이 차일피일 미뤄졌고 장모님께서도 내가 백구를 귀애하는 것을 보고는 당신이 적극적으로 나서서까지 조카양반을 재촉하시지 않았던 까닭에 백구의 목숨이 간당간당 유지되고 있었던 것인데 바로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 이 사건이 터지고 만 것이었다.
때는 7월 23일 새벽 3시 무렵. 유난스레 천둥과 번개가 몰아치던 밤. 소변이 마려워 잠시 눈을 뜨셨던 장모님이 화장실에 다녀와 다시 잠을 청하려는데 백구가 정신없이 짖어싸더란다. 그 소리에 잠을 못이루고 한참을 뒤척이다가 도저히 안되겠어서 백구가 묶여 있는 방향으로 난 창문으로 가서 그만 짖고 자빠져 자라고 고함을 치셨는데도 영 그치지 않더라네. 그래 혹 산짐승이라도 들었나 싶어 내다 볼려고 현관쪽으로 가는 덧문을 여는 순간, 아뿔싸 불이다, 불! 천정 쪽으로 불이 붙어 안에서는 잘 보이지 않던 것이 덧문을 여니 보이시더란다. 부랴부랴 장인어른 깨워 비상탈출을 감행하시고 집 밖으로 나와 119에 신고. 그 사이 장인어른이 어디서 소화기를 구해와 일단 진화에 성공하셨단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좀 떨어진 전신주에 벼락이 쳐서 전선을 타고 오다가 마지막 전신주에 연결되어 있는 처가집으로 고압전류가 순간적으로 흘러 들어와 전선들이 타면서 발생한 화재라는데 이렇게 전선이 타는 경우는 처음에는 조금씩 타다가 어느 순간에 확 번져버리는데 그때는 방법이 없단다. 십중팔구 큰일을 치루고 말았을 건데 조기에 발견해서 정말 다행이라는 소방관의 말을 전하는 장모님의 얼굴에는 그때까지도 놀란 기색이 완연했었다.
아내가 만삭이어서 장모님이 놀란다고 연락을 안해 사고나고 이틀 지난 일요일날 평상시처럼 반찬 좀 얻어갈까 싶어 들렀다가 그때서야 얘기를 들었다. 백구 녀석 신통한 일 했다고 쏘세지보다 더 좋은 육포(누가 주고 간 건데 어쩌다 시일이 흘러 사람이 먹기에는 좀 그렇고 해서 가져왔던 거지만)를 주고 있는데 웬일이람, 장인어른이 개밥을 한그릇 가득 들고와서 백구를 먹이는 게 아닌가. 장모님 말에 의하면 장인어른은 자기 팬 사람으로는 기억하는 개는 많아도 밥 준 사람으로 기억하는 개는 없을 거라셨건만.
이제 따로 쏘세지를 줄 필요가 없어졌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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