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들/끄적여본시

흰둥이는 어디에나 산다

멀리가세 2008. 4. 22. 21:47

네살 먹은 조카딸
천방지축
외할머니 집안 곳곳을
헤집고 다닌다.
아무리 달래고 얼러도 욘석

들은 체도 않고 콧방귀만 뿡뿡.

별수 없군, 흰둥이를 불러야지.

 
그 방에는 흰둥이가 살아, 마당하고 이어져 있거던.


왠일인지 조카딸은 
그 녀석 말만 나오면 슬슬 꽁무니를 뺀다,

물린 적도 없건만.


아무튼 그런 연유로 흰둥이는
우리 집안 어디에나 산다.
조카딸이 가지 말아야 할 곳,
하지 말아야 할 모든 것에
흰둥이는 착 늘러붙어 살고 있다.

괜시리 떠오르는 옛생각.
일곱이나 먹었을까 부모님을 따라갔던 유적지,
내 또래 아이가 또랑또랑 유적 안내문을 읽고 있었지.

박수를 받으며 그 아이가 물러나자

슬며시 내 등을 떠미는 아버지.
모르는 글자는 없었건만 부끄러워 잠시 서 있다
도로 내려와 엄마 뒤에 숨었다.
그뒤로 남 앞에 설라치면 어느순간
어깨 위에서 나를 내려보고 있는 흰둥이.

딸깍, 누이가 TV를 켰다.
...
이명박 대통령은 이번 방미외교에서 특히
지난 10년간 소원했던 한미관계를 강화하여
전통적인 우호국가를 넘어
전략적 동맹관계로까지 격상시키는 것을 목표로
우선 한미FTA의 국회비준과 북핵문제 공동대응을
...

강신무(降神巫),
대통령의 얼굴에 신내림을 받는 무당의

도취된 얼굴이 겹쳐졌다.

그토록 벗어나고 싶었던 장군님으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이 결국은

그에게로 향하는 것이라니.
피하는 것과 귀의하는 것의 근본이
이렇듯 하나인걸.

어디에나 있는 무시무시한 흰둥이 덕에
응접실 누이 옆에 쭈그리고 앉아
응석이나 피우고 있는 조카와 눈이 마주쳤다.

녀석,

배시시 웃는다.

프로이트 아저씨,
마르크스 아저씨
저 꼬맹이만이 아니네요.
내 마음 속 어디에서도,
남한의 구석구석에서도,
무서운 흰둥이가 살고 있고나...






* 조카딸의 행동을 보다가 자연스레 내 마음 속에 내재하는 공포를 연상했었다.
그러다 이명박 대통령이 방미하면서 유례없이 한미일동맹의 강화를 얘기하는 걸
보면서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의 공포와 흰둥이가 겹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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