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릿느릿 컴퓨터가 켜지는 동안
토마토 쥬스를 홀짝이며
러시아, 추운 나라,
안나 아흐마또바의 시를
읽는다.
늘어질대로 늘어진
늦더위의 기세에 눌려
가을은 내내
9월의 언저리를 떠돌다
막판에 몰려서야 성큼
제 계절에 발을
담궜다.
그리고 시월,
나무의 그림자들이
그리움처럼 늘씬하다.
언제나처럼
붙잡을 수는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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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수 없는 경계
엔. 베. 엔 에게
안나 아흐마또바
사람들의 친근함 속에는 알 수 없는 경계가 있으니,
사랑도 정열도 그 경계를 가로지를 수 없는 것 -
장엄한 정적 속에서 두 입술이 합쳐지고
가슴이 사랑으로 산산히 부서진다 해도.
여기에선 우정도 무력하고,
넋이 자유롭고 색욕의 느릿한 권태를 모르는
숭고하고 열렬한 행복의 나날에도,
여기에선 무력하다.
이 경계에 돌진하는 이들은 미쳐가고,
여기에 도달한 이들은 번민으로 휩싸이느니.....
이제 그대 알았을 테지요, 왜 내 가슴이
그대의 두 손 밑에서 두근거리지 않는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