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지 해장국집
그 해장국집은 술집 골목 끝에 있었다.
새벽이 되면
여자들이 화장을 지우며
유리문을 밀고 들어오곤 했다.
해장국에는 날달걀이 따라 나왔다.
주인은 국에 풀어 먹으면 속이 부드러워진다고
자랑하곤 했다.
하지만
이따금 검은 선지 위에
노른자를 동동 띄운 채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는 여자도 있었다.
대개는 앳된 여자였다.
불이문(不二門)
경허선사는
길가에 버려진 채 살이 썩어가는 문둥이 여자를
자기 방에서 보살폈다
을지로 지하계단에서
웅크린 채 떨고 있는 거지 모녀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한몸이 될 수 없다
문둥이 여자가
경허선사 곁을 떠나며
한동안 기댄 채
수줍은 미소만 지어보였다는 불이문
을지로 지하계단을 오르내리며
숱하게 허물었다, 다시 세우는
그 불이문
1. 뭉크의 그림들을 처음 보았을때, 아니 볼때마다 나는 공포감을 느낀다.
벌거벗은 채 정면을 응시하는 소녀의 그림, 나체로 자신을 몸을 내려다 보는 여자(혹은 창부), 관람자를 등진채 다리 아래를 내려다 보는 소녀들, 그러다 한 소녀만 돌아서 있는 그림. 이 모든 그림은 자기 인식의 그림이라고 생각했었다. 자기인식 - 자기가 파악하는 자기의 모습. 하지만 자기를 보는 그 눈은 자기의 눈이 아니다. 유사이래 유적존재(類的存在)가 아닌 오직 개별자로 존재했던 인간은 없었기 때문에 애초부터 '자기의 눈'은 존립자체가 불가능하다. 존재하는 것은 초자아의 눈이고 관계의 눈이고 사회의 눈이다. 그래서 자기정체성이란 남의 눈을 통해 자기를 확립하는 과정이라는 역설이 성립된다. 정면을 응시하는 소녀는 관람자(타자)의 눈을 통해 결국 자기자신을 들여다 보는 것이고, 다리 난간에서 돌아선 소녀 역시 등만 보이는 소녀들(註)과 달리 정체성에 대한 자각을 시작한 것이다. 그 자각은, 그러나 '불안하다.' 이후로 소녀(사람)는 자기 존재의 의미를 외부와의 긴장 속에서 성립시켜야 하는 막중한 의무(?)가 부과되기 때문이다.
아직 앳된 술집 작부가 아침 선지 해장국 위에 풀어져 있는 날달걀을 본다.
'부화도 못된채 깨져 버린 달걀, 피지도 못한채 시들고 있는 내 인생.'
피곤한 몸, 후닥 아침 먹고 겨운 잠에 빠지면 그 아침, 비단 이불인들 나일롱 이불인들 달거니 지났을텐데 그예 자기를 보고 말았을 터. 수천년전 신전매음처럼 고귀함에 가까운 무엇이 있었다면 시든다 여길 것도 없었으련만 자기를 바라보는 지금의 눈들은...
2. '눈들'은 시대에 따라, 상황에 따라 바뀐다. 그저 형성된, 집단적인 망집(妄執)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나 그 망집이 모두의 준거가 된다. 그렇다면 과연 개별자는 존재가능한 것이냐?
"世間의 集(발생)을 여실하게 바로 보면 세간이 없다는 견해가 있을 수 없고, 세간의 滅을 여실하게 바로 보면 세간이 있다는 견해가 있을 수가 없다. 여래는 그 두 끝을 떠나 중도에서 설한다." (아함경 권10, 동국대학교 출판부 <불교학개론>에서 재인용)
無常의 변화도 있다 보면 있는 것이고, 無常해서 본질이 없다고 여기면 없다는 논리인가?
내 수준에 둘이 아닌(不二) 경지가 어떠한 것인지 알 도리는 없고 다만 각자(覺者)가 만들어 내는 상징과 현실의 거대한 일치를 목도할 뿐이다. 무명의 연기가 세간이라면 육신 또한 그러하고 개별자의 차이는 다만 업의 차이에 불과할테니 연기 이전의 상태에서는 그와 내가 분별되지 않았을 것이요, 또한 업을 멸한 상태에서 보자면 육신의 차이는 이미 의미가 없으리.
경허선사는 썩은 자기의 몸을 치료하고 떠나 보낸 것이요, 문둥이 여인의 수줍은 미소는 염화미소일런지... 연기 이전과 업멸 이후의 간극에는 나와 타자의 차별성과 동일성의 대립이 이렇듯 현실적으로, 또한 상징적으로 놓여 있겠거니 추측이나 할 따름.
3. 시집 <숨결>에서는 위 두편이 제일 기억에 남았다. 말로야 앞시의 술집작부가 뒷시의 경허선사이기도 하고 문둥이 여자이기도 하다고 말할 수도 있고 앞시의 작부는 인식이요 뒷시의 경허는 초월이라 말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시인이 진단한 자기의 상태대로 우리 장삼이사들이야 그 누구와도 한몸이 되지 못하고 맨날 불이문만 세웠다, 허물고 있겠지.
註) 등만 보이는 소녀들
정체성 이전의 존재, 자기의 모습(얼굴)이 없다. 뒷모습만 보이는 소녀들도 섬짓하기는 마찬가지인데 그 두려움은 다리 아래 있는 것, 즉 '물'로 대변되는 미분화(未分化) 자체에 대한 공포로 느껴지기도 하고, 반대로 미분화로의 복귀에 대한 욕망(타나토스)에 저항하는 공포로도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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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아래 두편도 역시 <숨결>에 수록되어 있는 시들인데, 두 군데 지명이 현재의 나와 직접 연관이 있거나 한때 관계가 있었던 사람이 떠올라 정감이 가길래 기록해 두다.
강릉의 봄햇살
강릉에 봄햇살 내리시면
세상 인연의 끈 모두 놓아버리고
잠 좀 자야겠다, 잠 좀 자야겠다
지금 지나가는 세월이야
송정에서 안목 사이를 흐르는
아지랑이, 아지랑이 강물 같은 거
그토록 오래된 바다도, 바다소나무도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감자밭도
아지랑이 품 속에서는 한낮의 꿈일 뿐
강릉에 봄햇살 내리시면
질긴 인연의 끈 모두 놓아버리고
눈 좀 붙여야겠다, 눈 좀 붙여야겠다
언덕배기
이문동 외대(外大) 뒤편
재수할 때 착한 형과 함께 자취하던 곳
첫사랑 때문에
밤새 오르내리며 날숨을 고르던
언덕배기
존경하는 시인이
젊은 여인과 몰래 살림을 차렸던 곳
이따금 어그적어그적 찾아와
며칠씩 묵고 갔다는,
때로 서로의 머리를 쥐어뜯기도 했다는
그 언덕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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