깔끔하게 낡은 옛책을 보면 곱게 늙은 부인네가 연상된다.
어디 한 구석 흠간 곳 없이 다만, 전체가 같은 농도로 바래버린
종이만이 세월을 증거하는 책에서는 단아한 향취가 묻어난다.
고등학교때 문학 참고서에서 보고난 후 종내 잊혀지지 않는
이 시도 늙으면 그렇게 되리라 생각했다.
피아노
전봉건
피아노에 앉은
여자의 두 손에서는
끊임없이
열 마리씩
스무 마리씩
신선한 물고기가
튀는 빛의 꼬리를 물고
쏟아진다.
나는 바다로 가서
가장 신나게 시퍼런
파도의 칼날 하나를
집어 들었다.
피아노 소리라는 청각적 이미지가 물고기와 빛의 꼬리, 시퍼런 파도,
칼날이라는 시각적 이미지로 옮아가는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참았던 오줌 다 누고 부르르 떨 때의 시원한 쾌감에 도달한다.^^
특별한 의미를 생각할 필요없이 시가 주는 이미지를 샤워하듯이
즐기면 되는 시, 그러나 그 표현의 싱그러움이 잊지못할 비범함이 되는 시.
이 시로 각인된 시인 전봉건은 그렇게 의미보다는 표현이었다.
그러던 어느날,*시집이 한권 나를 찾아 왔다. 언제나처럼 책더미와 함께.
<사랑을 위한 되풀이>(춘조사,1959년 초판)
전봉건의 두 번째 시집.
이미 46년 전에 나온 시집이건만 참 곱게 낡았다.
수록된 시중 기억에 남는 시.
고전적인 속삭임 속의 꽃
전봉건
Ⅴ
에
베
레
스
트
의 산허리에 들어 붙은 등산대.
그걸,
좀
멀리서
보는
눈엔,
......
몇 마리의 개미일 거다.
그렇게 있기 비롯하면서부터
봄도 기적도 없는
얼음덩어리
낭떠러지에
매어달린 개미.
실은 기어오르는 개미다.
한 마리의 발이 헛디디면,
일기 시작한
새하얀 눈보라를 뚫고 얼음의
낭떠러지를 새까맣게 떨어지는
개미.
그 한 마리의 개미의
눈이 깜박하였다면
무엇을
생각
하였을가.
죽음이었을가.
한 줄기의 로우푸를 스스로 선택하였을 때
이미 등산하는 사람의 머리는
죽음으로 가득하다고 한다.
그런데
산허리에서 끊어진 로우푸로부터
거꾸로 떨어져 눈 위에 부서진 썬그라스의 조각을 주어모아
맞추면 또 발을 헛디딘 사람이 죽으면서 지닌 마지막 생각이
어리는데-.
글쎄 그것이 나의 가장 신선할 때의
모습과 같음은 웬일인가.
거대한 빙벽에 팽팽하게 매어달린 로프가 끊어져 떨어질때
등산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엉뚱하게도 나는 그 등산가에게 늘상 물어지는 질문, 즉
“왜 산에 오릅니까?”라는 물음에 대한 답과 같았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본질을 부정하는 사유도 결국에는 ‘넘어섬’을 꿈꾸는 것 같다.
그 초월의 길은 다시 신에게로 향하거나, 원점회귀가 싫다면
‘행동’에 귀의하는 것이 다반사이다.
다른 길은 없을까?
이 시를 읽으면서, 처음에는 피아노의 시인에게서 이렇게
‘의미 가득한’ 시가 나왔다는 것이 흥미로웠다. 그러나 시를
읽어가면서 차츰차츰 의문이 일었다.
‘혹시 이 시가 먼저 나온 것 아닐까?’
인터넷을 뒤져봤다. 역시 피아노는 1980년이나 되어서 발표된
시였다.
더러에게는 탐미가 초월의 길이 될 수도 있겠지.
열여덟의 샅 언저리를 진저리치게 만들었던 시 <피아노>가
그때 이미 늙은 시였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곱의 나이를 더
먹고 해본다.
푸히, 다시 젊어지는 건가!
* 시집이 한권 나를 찾아 왔다.
네루다의 시 <시>중에서 한구절을 약간 흉내내서.
네루다에 대한 나의 오마쥬라고나 할까^^ (주접이다ㅠㅠ)
<시>
그러니까 그 나이였어......
시가 나를 찾아왔어. 몰라, 그게 어디서 왔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