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들/읽은시

봄비의 내력(來歷), 광주

멀리가세 2006. 6. 3. 00:42

 

봄비의 내력(來歷)


                    김혜숙



내 몸살을 대신 앓아주지 못하는 슬픔으로

나의 추위를 추워하지 못하는 부끄러움으로

내 세월을 대신 살아주지 못하는 죄스러움으로

아, 이젠 괜히 나를 낳아 놓으신 후회로

어머니는

하느님 옆에서도 늘 울기만 하시어

온통 이 세상 모두를 적신다.


내 뜰에 몇 포기 꽃나무들은

멋도 모르고 즐거워

내 어머니의 빈 젖을 빨고

가끔은 청하여

이 빠진 옛이야기도 듣지만

오늘

이 봄비의 내력은 알 턱이 없다.


내 속에서 내가 키운 아이들,

내 젖을 물리고 내 말을 가르쳐 준 아이들,

내 꿈을 옮겨 심고, 내 노래를 따라 부른 아이들

마침내

내 눈동자 속에서 제 얼굴을 찾아낸 아이들


오늘

봄비 속에 데리고 나와

내 사랑의 아픔과,

내 사랑의 슬픔과,

내 사랑의 무능과,

그리하여 모든 내 사랑의 부끄러움을

길게 길게 풀어 이야기해도

그들은 알 턱이 없다

이 봄비의 내력을.



<예감의 새>라는 시집에 수록된 첫시였다.

봄비 내리면 누구나 감정의 변화가 생긴다.

그러나 변화의 사연은 개인마다 다를 것이다.

시인은 자기의 사연을 적고 그것을, 자기 봄비의 내력이라고 말한다.

‘모두는 서로 다른 봄비를 맞고 있을지도 모르지.’


이 발상의 참신함을 빼고는

가슴 저미는 표현도, 밀도 있는 언어미도, 정교한 구성미도 없는 시라고 판단했다.

그저 제법 오래된 시집같아 혹 이 시인의 주변 사람 중에 기념으로 소장하고자

하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 싶어 발행연도나 확인하고 소장용도서 쪽으로

돌리려고 했다.


1980년 11월 15일 발행.


가슴이 씁쓸해졌다. 1980,1980...

그 연도를 보고 나서야 오늘이 5.18이라는 것을 알았다.

벌써 25년전이니까.

내가 1985년에 느낀 4.19만큼의 거리일테니까.


그래도 못내 가시지 않는, 늦게 깨달은 것에 대한 죄책감, 씁쓸함,

또 알 수 없는 종류의 뭉클함.


봄비의 내력이 1980년 5월 18일에 흩날렸을 피와 눈물인 모든 분들의

영혼에 평화와 안식이 깃드시라...


 

 

  (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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