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년도 여름. 농활문제로 전주에 내려갔다. 그곳 무슨 일일찻집에서 한 시인을 만났다. 동행했던 분이 그녀와 안면이 있어 잠시 합석을 했었다. 익히 나는 그녀의 시명(詩名)을 알고 있었다. 우리들 사이에서 그녀는 제법 인기있던 학생 시인이었으니까. 몇마디 말을 나누다 내 아는 후배가 댁을 무척 좋아한다고 사인 한 장 해달라고 부탁했다.
“제가 뭐 대단한 사람이라고... 저기 대신 주소 알려주시면 책을 하나 보내 드릴게요.”
주소를 주고 서울로 올라 오고 그리고 며칠이 지나서 내가 알려준 후배 앞으로 책이 한권 배달됐다. 앞면지에 몇 줄의 정성어린 글과 함께. 그 후배는 당시 나와 사귀고 있던 모양. 점수를 많이 땄다.
시인이 보내준 책은 자신의 시집인 <쑥고개 편지>.
13년을 돌아 오늘 그 시집이 서점에 들어왔다.
돌이켜 보면 그 시절 너무 비장하게 살았던 것 아닐까? 시편들 전반에 묻어있는 가난에 대한 동조, 적에 대한 분노, 투쟁에 대한 결연한 의지. 김용택의 섬진강과 김남주를 섞어 놓은 듯한, 아직은 서툴러 보이는 시들. 그러나 나 역시 그 시절에는 정말로 절박하지 않았던가. 너무 여물어서 나와 내 주변 이외에는 도통 개입할 수 없는 지금의 가슴을 배제하고 옛날의 절실함을 잠시 떠올린다면 이런 시는 분명 아름다운 시였을 것이다.
내 애인은
- 최은희
내 애인은 오월대 전사
피가 고여 흐르는 이 땅의
눈부신 꽃불이다
최루탄 자욱한 거리에서
일제히 타오르는 횃불
나는 그의 등 뒤에서
진격의 나팔을 높이 부는 나팔수다
쓰라린 눈을 들고
전사의 무리 속에서
나는 그대 모습 쉽게 찾고
최루탄 총성 속에서도
그는 내 나팔소리 선명히 듣는다
막걸리 한 잔에도 쉽게 취하고
라면 한 그릇에도 감사할 줄 아는
우리는 이 땅의 아들딸
피멍든 조국의 상처에
뜨거운 입맞춤으로 달려 나가는
내 애인은 오월대 전사
나팔소리 드높이 울리는
나는
전사의 애인이다
그리고, 아무리 격렬한 투쟁의 와중에 있었더라도 어쩔 수 없이 갓 넘은 스물에서 스며나오는 연시도 있다. 제법 매서운 찬바람이 부는데도 딱히 외롭지 못해 12월에게 미안해지기까지 하는 요 인간의 가슴에도 다소의 훈기를 불어 넣어주는.
연서
눈 뜨면서 그대 생각했습니다.
깊은 잠에서 깨면
이마에 부딪쳐 빛나는 햇살처럼
그렇게 다가와 있는 그대
서리 내린 길을 걷다가 고개 들면
거기 물드는 떡깔나무 옆에
나무 그림자로 기다리는 그대
코스모스 핀 앞길을 걸어
갈대 서걱이는 저쪽 끝
바람을 잡고 손짓하는 시월 아침의 그대
나는 두려움 많은 겁보 아이처럼
눈물이 항상 눈에 고인
다섯 살의 여자아이처럼
강가 모래 위 땅그림을 그리면서
장사 나간 엄마가 돌아오길 기다리던
유년 시절 그 슬픈 기억처럼
그저 그대 바라보고 기다리고
그리움에 몇 줄 편지를 쓰면서
눈 뜨는 아침마다 그대 생각합니다.
눈 뜨는 아침마다 그대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