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정은, 뭐라고 할까 가둬두는 힘이라고 하면 적당할까?
아무튼 내지르지 않고 쌓아두는, 내성적인 사람같은 것이 있다.
물론 그런 사람이라고 마냥 쑥맥인 것은 아니지. 누구에게나
임계점은 있는 법이니.
2. 80년대의 민중시 중에도 서정은 있다. 특히 전반기의 시들은
직설이 허용되지 않았던 폭압적인 시대상황 때문에 풍부한
서정과 은유를 통해 분노를 축적하고 있었다.
그러나 87년을 거쳐 전면적인 항쟁 국면에 들어서면서부터
직설적인 시들이 단연 두각을 나타냈고 서정은 부차적인 위치로
내려갔다.
그리고 다시 90년대 중반...
3. 요즘에는 바람을 타고 서점 안으로 밀려 들어오는 낙엽을
하루에도 두세번씩은 쓸어내게 된다.
오늘도 점심나절에 비질을 하는데 낙엽들이랑 같이 작은 책자
하나가 뒹굴고 있는 것을 보았다.
<땅거미로 어두우면 해돋이로 밝아오면>
시집인데 제목도 좀 촌스럽고 표지디자인도 어수룩해서 그다지
탐탁히 여겨지지 않았지만 무심히 앞표지를 넘겼다.
시인의 약력이 나왔다. 단 세줄.
1960년 5월 2일 충남 논산 출생
1972년 2월 17일 연산 청동국민학교 졸업
1979년 3월 2일 서울 신촌 새생활 야학 졸업
짧은 약력이지만 그 속에서 이 시인의 삶의 면모를 대충 짐작케 하는
것은 시대의 공유때문이겠지.
시는 역시 민중시였다. 그러나 1995년에 발행된 이 시집에서
느껴지는 정서는 1980년대 전반기, 아니면 더 이른 70년대에 가깝다.
투쟁의 파고가 꺽이면서 서정이 다시 두각을 나타낸 것일테지.
다시 가둬두어야 할 무엇, 쌓아두어야 할 무엇이 생긴 거겠지.
4. 1995년. 그해 6월에 나는 군대에서 제대했다. 1994년이었던가
1993년이었던가엔 최영미의 <서른, 잔치는 끝났다>가 시집으로서는
공전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박노해는 감옥에 있었고, 김남주는 서거했다.
백무산, 이산하는 문학적으로 종적을 감추었었다.
그러다 2000년도 넘어서 다시 돌아왔다.
변형된 명상시집을 가지고.
비록 이 시집을 보기 전에는 누군지도 몰랐지만
김만진이라는 시인이 다 떠난 그 자리를 힘겹게 버티고
있었구나 생각하니 숙연하게 안쓰러웠다.
작은 경의를 표하고 싶다.
솔잎 불꽃
김만진
2
오래된 내 사진 한 장 꺼내어
뒷 산 소나무 솔잎 따서
예쁜 불꽃을 지피었습니다
어느새 잊혀진 내 얼굴빛을
솔잎 불꽃으로 피워냅니다
감미로운 가을 바람이
여리게 고동치는 내 가슴팍을 헤집으면
하얀 갈대꽃 송이는
허공으로 흩어지고요
깔끔한 불꽃이 되는 지난날의
빛바랜 사진 한 장 다시는
그 얼굴빛 찾을 수 없다 하여도
향긋한 솔 향기에 실리어
영원으로 떠납니다
3
그대,
솔잎을 태워 보셨나요
사진을 태워 보셨나요
솔 향내 번지는 솔잎 향기에
고독 한 장 태워 보셨나요
그대,
멀어질 땐 외롭지 않았어요
가까울 때 외로웠지요
빛 바랜 사진 한 장 태우는 것은
날카로운 허공의 침으로 떨어지는 가을 솔잎에
예쁜 불꽃 화음
주는 거래요
겨울이 봄을 만날 때
김만진
눈은 겨울의
하얀 살점 이예요
겨울이 봄을 만날 때
어디 그냥 만나나요
산과 들 온 누리에 쌓인
제 하얀 속살을
따스한 봄 햇살에 흔적없이
타들어 가며 만나지요
너와 내가 만날 때
그래야 하고
우리가 우리를 만날 때
그래야겠지요
얼음은 겨울의
수정뼈이예요
겨울이 봄을 만날 때
어디 그냥 만나나요
개울과 강 수정으로 얼어붙은
제 하얀 뼈를
따스한 봄 햇살에 하염없이
녹아들며 만나지요
너와 내가 만날 때
그래야 하고
우리가 우리를 만날 때
그래야겠지요
'글들 > 읽은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지중해적 (두서없는 생각조각) (0) | 2006.06.03 |
---|---|
가을 타는 날 (0) | 2006.06.03 |
네가 수채화라면 나는 널 그리는 화가이고 싶다 (0) | 2006.06.03 |
다시 남자를 위하여 (0) | 2006.06.03 |
다카르패션 (0) | 2006.06.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