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책에서였던가, 신라 문화의 특징을 말하면서 ‘육체성(이 용어가
정확한 기억인지는 잘 모르겠다)이 있다’는 표현을 썼었다. 조선시대
처럼 정신적인 가치만을 존중하지 않고 육체적인 아름다움과 욕망을
인정하고 곧잘 표현해냈다는 의미일 것이다. 삼국유사만 보아도 그런
기사들이 종종 나온다. 수로부인을 위해 꽃을 따준 노인 얘기라든가,
탑돌이를 하다 눈맞은 여인과 통정하는 김현의 이야기라든가...
문정희의 시집 <남자를 위하여>에도 신라의 고사를 소재로 취한 시가
나온다.
신라의 무명 시인 지귀
큰일났다. 가만히 있어도 목구멍으로
시가 술술 쏟아져 나오니.
천기누설이다.
머리에 이가 있고
거북 등처럼 손이 튼 계집애가
제 짝이라는 것을
누군 모르랴.
그런데 감히 여왕을 사모함은
전생에 지은 이 무슨 아름다운 업보인가.
세상에 못 맺을 사랑이란 없다는 것을
떠꺼머리, 너는 무엄하게도 알아 버렸구나.
길 비켜라.
사랑이 사랑을 찾아간다.
이 준엄한 힘 앞에
세상의 지위쯤은 한낱 재미에 불과하리.
지금은 오후 두시,
그대의 선덕은 이미 온몸이 흔들려
다보탑 아래 깜박 잠든 지귀에게 가 있느니
지귀여, 지귀여, 사랑하는 지귀여
네 가슴에 던진 선덕의 금팔지에
큰 불이 일어
다보탑 석가탑 다 태우고
신라땅 모든 사슬 끊어 버려라.
미천한 신분이었음에도 지귀는 선덕여왕을 사모했다. 어느날, 기도를
드리러 절에 온 선덕여왕을 기다리다 탑 아래서 깜박 잠이 들었는데
그 사이 선덕여왕이 지귀의 가슴에 금팔찌를 놓고 갔다. 잠이 깬
지귀는 여왕의 금팔찌를 보자 사모하는 마음이 불길로 일어 결국
자신을 태우고 말았다. 사랑의 열정에 온 몸을 걸 수 있었던 지귀는
높은 신분의 그 누구보다 고귀한 사람이고 격정적인 시인이었다고
시인은 말한다.
관습적이지 않은 사랑을 다룬 이 시에서도 역시 신라의 육체성은
드러난다. 그러나 이 육체성은 시인의 시에서라기 보다는 설화
자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 같다. 오히려 본질적으로 신라와 조우하는
그녀의 시들은 ‘현실’을 다룬 이런 시 아닐까?
다시 남자를 위하여
요새는 왜 사나이를 만나기가 힘들지.
싱싱하게 몸부림치는
가물치처럼 온몸을 던져 오는
거대한 파도를 ……
몰래 숨어 해치우는
누우렇고 나약한 잡것들뿐
눈에 띌까, 어슬렁거리는 초라한 잡종들뿐
눈부신 야생마는 만나기가 어렵지.
여권 운동가들이 저지른 일 중에
가장 큰 실수는
바로 세상에서
멋진 잡놈들을 추방해 버린 것은 아닐까.
핑계 대기 쉬운 말로 산업사회 탓인가.
그들의 빛나는 이빨을 뽑아 내고
그들의 거친 머리칼을 솎아 내고
그들의 발에 제지의 쇠고리를
채워 버린 것은 누구일까.
그건 너무 슬픈 일이야.
여자들은 누구나 마음속 깊이
야성의 사나이를 만나고 싶어하는 걸.
갈증처럼 바람둥이에게 휘말려
한평생을 던져 버리고 싶은 걸.
안토니우스 시저 그리고
안록산에게 무너진 현종을 봐.
그뿐인가, 나폴레옹 너는 뭐며 심지어
돈주앙, 변학도, 그 끝없는 식욕을
여자들이 얼마나 사랑한다는 걸 알고 있어?
그런데 어찌된 일이야. 요새는
비겁하게 치마 속으로 손을 들이미는
때 묻고 약아빠진 졸개들은 많은데
불꽃을 찾아 온 사막을 헤매이며
검은 눈썹을 태우는
진짜 멋지고 당당한 잡놈은
멸종 위기네.
그녀의 다른 시-사랑하는 사마천 당신에게, 대동여지도 앞에서 등-을
보건대 그녀가 그리는 남자의 상은 육체적 강건함에 빚댄 ‘정신의 강
건함‘을 지닌 사람이지만 그 표현에 있어서는 사뭇 육체적이며,
심지어는 육욕적이기까지 하다.
<다시 남자를 위하여>에서는 특히 더. 이를테면 이런 시어들.
* 가물치=정력, 힘, 남근 (이 단어 앞뒤로 붙은 싯구를 같이 보면 더욱
화끈스럽다. 싱싱하게 몸부림치는/가물치처럼 온 몸을 던져 오는/
거대한 파도를...)
* 야생마=‘말○○’에서 떠오르듯 역시 정력
* 거친 머리칼=삼손을 연상시키지
.
.
.
킥킥 재미있게 읽다가 순간 찜찜해 진다.
우씨, 이 아줌마 기준에서 보면 나는 영락없이 잡종이네ㅠㅠ
(2002-3년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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