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들/책이야기

홍윤숙 시집 <장식론>

멀리가세 2009. 9. 9. 23:54

 

 

 

 

 

 

홍윤숙 제3시집 <장식론>, 1968년 하서출판사에서 발행. 題字한 이가 김동리이고 카바장정을 맡은 이가 화가이자 시인인 김영태다. 자주 오시는 손님 한분이 "옛날 시집들은 참 공을 많이 들였어요. 요즘 책들은 너무 기계적이야."라고 말한 적이 있다. 나도 익히 그런 느낌을 가졌었다. 언뜻 보기에는 요즘 나온 시집들이 훨씬 세련되고 깔끔해 보이지만 대개가 시리즈 시집으로 기본 디자인에 제목과 이름만 바꿔 달고 나온다. 그런 의미에서 기계적이라는 말을 썼을 것이다. 물론 요즘에도 공들여 장정한 책들이 아니 나올리 없지만 뭐라 그럴까, 옛날에는 책 내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라서 하나하나에 공을 더 들였다고 해야하나? 인쇄술이야 지금에 비할 바가 못되지만 옛날 책 장정을 들여다 보면 당시의 시각에서라면 흠잡을 데 없이 세련된 것에 더해 정성까지 듬뿍 얹혀져 있다는 생각이 든다.

 

써놓고 보니 푸히, 살짝 웃음이 나네. 나도 나이가 먹었나? 옛것은 좋은 것이여 분위기구만. 마흔인가 쉰인가 넘으면 추억을 먹고 산다는 말이 맞는걔벼.

옛것을 좋아하는 이유는 호사취미만은 아니지. 옛것에 묻어 있는 제 젊은 날의 흔적을 더듬어 보는 마음 또한 적지 않으리. 우리가 추억이고 경험이라고 믿는 청춘은 안타깝게도 공상이다. 많은 것이 사상되고 원하는 기억과 덧붙인 환상으로 재구성된. 그렇게 우리는 나이를 먹어서도 청춘을 소비한다. 부질없는 걸 알면서도 끊임없이 청춘을 만들어낸다.

 

더욱이 가을이다. 각박한 생활의 전선같은 여름의 무더위를 견디고 한숨 돌리자 선선한 바람 불고 낙엽 지니 하, 이렇게 또 한 세월 가는구나, 뻥 뚫린 느낌. 이건 어지간히 무덤덤한 사람의 가슴에도 한번쯤 긴 여운을 남기지. 무얼로 채울거나~

 

 

 

장식론 裝飾論 2

 

                                     - 홍윤숙 

 

 

여자가

장식을 하나씩

달아가는 것은

지닌 꿈을 하나씩

잃어가는 때문이다

 

꽃이 진 자리의

아쉬움을

손가락 끝으로

가려보는 마음

 

나뭇잎으로

치부를 가리던

이브의 손길처럼

간절한 것이기에

꽃 대신 장식으로

상실을 메꾸어 보는 것이다

 

(누가 십대의 소녀가 팽팽한 손가락에

한 캐럿 다이야 반지를 끼고 다니던가

그 애들은 그대로가 가득 찬

꿈이겠는 걸)

 

잃어버린 사랑이나 우정

작은 별의 꿈들이

여름 풀밭처럼 지나간 자리에

한장 가랑잎을 떨구는 가을

 

장식은

그 마지막 계절을 피워보는 향수다

파란 비취의

청허한 고독을 배워보는 창이다

 

아니 끝내 버릴 수 없는

나, 여자의

간절한 꿈을 실어 보는

날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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