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들/책이야기

은밀했던 최초의 일본소설 열풍

멀리가세 2010. 2. 9. 00:21

   사실 무라카미 하루키 이전에도 한국에서 붐을 일으킨 일본소설이 적지 않았다. 인간의 조건, 대망, 오싱 등등. 그리고 등한시하거나 고의로 외면하지만 은밀하면서도 더없이 광범위하게, 때론 저자의 이름조차 모른채(그때뿐 아니라 지금까지도 모르는 사람이 많을 거다) 읽힌 일본작가가 있으니 그 이름, 도미시마 다께오. 

   그의 주독자층은 당시 중딩, 고딩, 대딩 등 주로 결혼전의 성(性) 소외자들(?). 그의 소설은 읽히는 방식이 매우 특이한데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편독(偏讀)이라고나 할 수 있을까?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사람은 거의 없고 대개가 군데군데 읽다 만다는 거. 성적으로 억압된 한국사회의 학생들이 말그대로 X잡고 야한 부분만 건너건너 읽다가 책장 넘기는 속도가 가파르게 빨라지지. 그러다 어느 순간 책 읽기가 딱 멈춰지고 멈춰진 페이지에는 먼 훗날에도 또렷한 노란 자국을 남기지.

 

"여체는 그냥 육체가 아니다. 수많은 심리(心理)의 포물선으로 얽혀 덩어리진 육체다. 그 속에 바로 여자의 진실과 인간의 본질이 있다." - 작가의 말 중에서-

 

   영육(靈肉)이 분리되고 영의 절대적 우위가 확립된 후 몸이 겪게 되는 무시와 그에 가해진 억압 - 몸은 영의 발현이고 육의 욕망은 이성(영)으로 통제되어야 할 어떤 것이 된다. 이런 식으로 몸을 이해하던 시대나 사회에 위와 같은 발언이 던져진다면 자못 획기적인 것이 되겠지. 물론 그의 소설에서 그가 말하는 심리가 무엇인지는 우선적으로다 군데군데 읽느라 건너 뛰어버린 부분을 주의깊게 읽어 보아야 알 수 있는 사항이겠고, 또 그 심리라는 부분이 억압의 매우 협소한 한 부분이거나 왜곡된 것에 불과하다는 비판이 가능할지도 모를 일이긴 하다.

   그렇다 하더라도 인터넷도 없고 비디오도 감시가 심하던 시절 침대나 옷장 밑에 숨겨두었다가 수학정석 밑에 깔아놓고 휴지 몇조각으로 경무장한 채 작은 창(槍) 하나 발딱 세우고 사회적 억압(입시나 취업)과 몸에 대한 억압이 덧쳐진 현실을 잠시나마 돌파하는데 일조했다는 것만으로도 도미시마 다께오, 꽤 괜찮은 편이라고 할만하지 않을까? 거기다 조금 비약하면 그의 표면적인 이력은 한국의 근대에 드리워진 의식구조와도 우연찮게 맞아 떨어진다.

 

   한국의 20세기는 일본에 대해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극단적인 혐오와는 정반대로 일본에 대한 욕망이 국가발전의 근본적인 동력 중 하나로 작동했다. 더욱 우스운 것은 이 기제마저도 일본이 19세 후반-20세기에 걸쳐 서구에 대해 보여왔던 태도-탈아입구(脫亞入歐)에의 열망과, 영미구축과 같은 서구에 대한 증오의 공존-와 동일한 구조라는 점이다. 표면적으로는 자신의 문화전통에 대해 끊임없는 애정을 표시하지만 내면적으로는 서구의 것이 좋은 것, 앞선 것이라는 등식이 성립하며 이런 인식은 당연히 자신들도 언젠가는 서구의 길을 가야한다는, 또는 가게 될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정치,사회,문화 전반에 걸쳐 일반화되는 이런 이해는 계몽의 시대는 물론 몸과 욕망에 대해 새로운 이해에 도달하던 시절에 발표되거나 재해석된 문학작품에서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서양에서 저런 소설이 유행하거나 과거의 어떤 작품이 재평가를 받으면 지금은 아니지만 우리도 언젠가는 그렇게 될 것이므로 그것을 인정해야한다는 추수의 심리가 그것이 옳으냐 그르냐는 판단에 선행한다.

   한국도 마찬가지인데 다만 일본과 차이가 있다면 서구에 대해 일본이 느낀 열등감을 우리는 일본이라는 중간단계를 하나 더 끼워 중층적으로 느낀다는 점이다. 근대 한국인의 내면에는 서구-일본-한국이라는 '근대의 위계'가 자리잡는 것이다. 

   거리에서 아무나 붙잡고 불쑥 아래 세가지 책을 들이대면서 어느 것이 좋은 작품일 것으로 생각되는지 순서대로 답하라는 설문을 한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1. 프랑스 작가 아뽈리네르의 <돈 쥬앙>

2. 도미시마 다께오의 <야회>

3. 마광수의 <즐거운 사라>

 

 

도미시마 다께오(富島健夫)는 1931년 10월 한국에서 태어났다. 패전으로 일본 후쿠오카로 돌아간 그는 와세다대학교 불문과에 입학, 아까하 후미오 교수 밑에서 문학수업을 받았다. 졸업 후 1955년부터 출판사에 근무하면서 집필 생활을 시작한 다께오는 남녀 애정의 탁월한 심리 묘사와 세련된 문장력을 인정받아 문단과 독자의 주목을 받게 되었고 곧 베스트셀러 인기작가로서의 발판을 굳혔다. 항상 신선한 감각과 새로운 소재를 끄집어내 끊임없는 작품활동을 하고 있는 그의 주요 작품으로는 <검은 강>, <어린 아내>, <첫날밤의 바다>, <청춘야망> 등이 있다. (아래 책 <뜨거운 손수건>의 저자 소개 부분을 그대로 옮김)

 

   증오하면서 선망하는 역설적인 의식구조가 현실에서 보여준 모순된 행태의 상징적인 사건이 아마 마광수, 장정일 사건일 것이다. 90년대 <돈 주앙>이나 뽈린 레아쥬, 도미시다 다께오의 여러 소설이 이미 번역되어 '합법출판물'로 버젓이 읽히던 시절에 마광수(92년), 장정일(97년)은 구속된다. 검열당국은 근대의 위계에서 우리보다 윗선 국가 출신 작가에게는 시차적 프리미엄(?)을 줘서 일찌감치 예술가로 대접을 해주고 후진 자국 작가에게는 '언젠가는 몰라도 지금은 풍속사범'이라는 멍에를 씌워 버리는 것이다. 판단기준이야 뭐, 이거겠지. 근대의 위계, 뿌라스 그들이 생각하는 '우리의 현수준'. 겉으로야 어떤 예술적 검토는 물론 예술외적 상황 등을 고려해서 종합적으로 판단했다 말할지라도 그 사람들의 판단의 근저에는 이런 의식이 없었다 말할 수 있을까?

   한국에서 나서 일본으로 돌아가 불문학을 배웠다는 도미시마 다께오의 단순한 삶의 이력에서 20세기 말미까지 이어지는 식민주의의 긴 끄을음을 읽어내는 것은 비단 나의 예민함에만 기인한 것일까?  

 

 

 

여인추억 2: 뜨거운 손수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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