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들/책이야기

小倉家(四日市)並某家入札目録 중 東坡

멀리가세 2011. 9. 21. 12:04

 

 

                              

 

 

 

 

 

 

1920년대에서 40년대 전반에 걸쳐 일본에서 간행된 고미술품경매도록이 몇권 들어왔다. 그중에서 단연 눈에 띈 책은 <小倉家(四日市)竝某家所藏品入札目錄(1934년)>이었다. 한국 고미술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小倉이라는 한자를 보면 바로 오쿠라 컬렉션을 떠올릴 것이다. 오쿠라 다케노스케(小倉武之助)는 일제시대때 대구지역에서 부동산 투기와 전기사업으로 막대한 부를 쌓은 후 그 돈으로 조선의 고미술품/문화재를 닥치는대로 사들인 사람이다. 물론 그 수집과 유출 과정에서 석연치 않는 점도 매우 많았지만 그 유물의 질과 양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유의 소장품/경매도록이 중요한 이유는 증거자료가 되기 때문이다. 현재 그 유물의 행방을 알 수 없다면 적어도 이 도록에 실린 때까지의 행적이 추적 가능해지기 때문에 그 뒤를 계속해서 캐볼 여지가 생긴다. 또 만약 현재까지 알려지지 않은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면 설령 그 유물을 찾지 못하더라도 작가와 작품의 존재여부를 확인한 것만으로 미술사의 한 부분을 채우는 중대한 역할을 하게 된다. 아울러 지금 남아있는 것이 확인된 유물도 그 유물이 거쳐간 궤적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저간의 사정이 이러하니 이 도록 제목을 보는 순간 내 머리 속에는 '이야, 뭔가 있겠는대!' 싶은 생각에 쾌재를 부를 밖에. 그러나 이런 기쁨도 잠시, 도록을 다 뒤져봐도 우리나라 미술품은 하나도 없었다. 오쿠라 가문이 '그 오쿠라 가문'이 아닌 모양이다.

 

감상과는 거리가 먼 이유로 뒤적여본 도록이건만 넘기다 보니 마음에 드는 그림이 하나 나오네.

 

                                              

 

연대나 화가의 이름은 없고 그냥 제목만 <東坡>로 되어 있다.

언젠가 앙리 까르띠에 브레송의 사진집을 보다가 엉뚱하게도 기운생동(氣韻生動)이라는 동양화의 이론이 떠올랐다. 그의 사진이론을 요약하는 '결정적 순간의 포착'이 기운생동에 대한 다양한 해석중 어쩌면 제일 근사(近似)한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온몸에 눈을 뒤집어 쓴 채 나귀 한마리에 의지해 묵묵히 설산(雪山)을 넘어가던 한 나그네가 잠시 숨을 돌리며 멀리 앞을 내다보는 모습(모자가 위로 들린 것으로 보아)을 간결한 필선 몇개로 담아낸 이 그림. 눈 쌓인 첩첩산중에 있건만 결코 조급해 하거나 안달하지 않을 것 같은 초연함이 얼굴 표정 하나 보이지 않는 뒷모습에서조차 마냥 뿜어져 나온다. 

삶을 살아가는 한 달관의 경지가 또한 이런 것 아닐까?

기운생동이라 하여 동적으로 생생한 어떤 양상을 보여주는 것만이 아니라면

'초연함과 묵묵함'의 이 결정적인 순간, 정적(靜的)이지만 더없이 생생한 이 순간 앞에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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