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 시대나, 우간다의 이디 아민 시대, 스탈린 시대, 그리고 지금의 북한 같은 전체주의 시대나 국가에 대해서 말할때 참 좋은 것은 무엇을 말해도 대체로 사실이라고 받아들여 준다는 점이다. 학살된 유태인이 3백만명이든 6백만명이든 크게 토를 달지 않으며 이디 아민이 실제 인육을 먹었는지 아닌지 구태여 고증할 필요가 없다. 어떻게 말하든 대충 다 사실이라고 믿어 주니까. 인간의 잔혹성이 독재라는 상황에서 극단적 양태로 드러날 수 있다는 점을 모두가 알기 때문에 누구 하나 고증되기 어려운 사실에 대해, 특히 모두가 가증스럽게 생각하는 정권 하에서 발생한 사실에 대해 그다지 토를 달고 싶어하지 않는 심리도 한몫 했겠고, 그런 정권이나 시대 바로 뒤에서 역사를 정리할 때 조금이라도 옹호하는 듯한 모습이 보이면 당시의 생존자들로부터 터져나올 격렬한 항의가 무서워서라도 기피하게 되는 탓도 있었을 것이다. 그뿐이랴, 전제정권과 대립각을 이뤘던 세력이 승리하게 되면 자신들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가장 확실한 수단으로 상대세력을 악마의 자식으로 만들어 버렸겠지. 그리고는 그 내용이 확고한 사실이 되어 끊임없이 후대에 '세뇌'된다.
그렇다고 해당 시절에 있었다고 얘기되어지는 바를, 증명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전부 사실이 아니라고 단언할 만한 똥배짱이 내게는 없다. 또한 대충 괄호를 쳐놓고 확인 안되서 지금은 언급 못하니까 나중에 확증이 나오면 채워 넣으라는 식으로 비워둔 채 역사의 문장을 기술할 수 있는지도 의문이다. 우선적으로는 괄호 밖에 있는, 우리가 사실이라고 기록한 사실의 객관성조차 수많은 시차가 교차하기에 보편적 합의에 이를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하고 설령 합의된 사실들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의 의미에 대한 해석 또한 분분한 데다가 더욱 골치 아픈 것은 공시적으로나 통시적으로나 그 사실과 사실 사이에 있는 빈공간(이것은 다소의 자료나 근거가 있는 괄호일 수도 있고 아무런 자료도 남아있지 않아 우리가 전혀 모르는 빈공간일 수도 있다. 괄호의 경우 앞서 말한 확증의 문제가 대두되고 후자의 경우는 마땅히 아무런 취급도 받지 않는다. 그러나 어떻게 알겠는가? 그 빈공간에서 앞뒤의 사실관계를 전혀 다르게 만들었을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의 사실성은 또 어떻게 확보하여 전후의 사실관계를 연결시킬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계속해서 남는다는 것이다. 결국 역사는 확인된 사실의 나열이 아니라 사실에 대한 선택과 해석을 선행한후 그 사실 사이의 괄호를 역사가의 상상력으로 메꾸어 가면서 문장을 완성하는 것이라고 밖에 할 수 없다. 누구 말대로 존재하는 것은 역사가 아니라 역사책일 뿐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역사는 사실이 아니라 (선택되고 상상된 낱말로 구축된) 하나의 거대한 신화가 된다.
이 책 <지옥의 여감방>은 친위대 여자수용소 소장이었다는 저자가 밝힌 히틀러 시대의 비록이다. 책을 구성하는 내용은 크게 세가지다. 당시에 어떻게 소년소녀들이 히틀러 소년단(유켄트)과 친위대를 선망하게 되었으며 어떤 절차를 거쳐 가입하고 진급했는지가 첫째요, 한편으로 인종적 순수성을 유지하기 위해(표면적인 이유일지라도) 또다른 한편으로 친위대 내부에서 결속을 다지기 위해 어떤 성(性)적 교환이 있었는지 알려주는 것이 둘째요, 첫부임지였던 아우슈비치를 비롯 자신이 부소장으로 있던 다츠하우 수용소, 소장으로 있던 뢰벤스부리크 수용소에서 벌어졌던, 잔악하고 음란한 학살과 학대의 만행을 고백하는 것이 세번째다.
읽으면서 일부는 수긍이 갔지만 상당부분은 과장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일었다. 친위대를 귀족집단화 시켜가는 부분은 인종주의를 극단으로 몰아갔던 나치의 행태를 볼때 그럴 수도 있겠거니 싶었지만 수용소 내에서 친위대 여자장교와 수용소장, 수용소장 부인과 친위대 남자장교 사이의 성적 교환같은 것은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수용소 장교들이 보는 앞에서 여자 수인과 남자 수인에게 성행위를 시키고 절정에 이를 무렵 여자가 남자를 목졸라 죽이는 장면도 마찬가지였고 친위대 남자장교를 위해 저자가 자기 관리 하에 있던 유태인 여자 수인에게 가학적 학대를 할 수 있게 해주는 부분도 그러했다. 이런 일들이 수많은 수용소 중에서 특정한 곳에서 이례적으로 발생할 수는 있었을 테지만 문제는 이 수기를 읽다보면 앞서 말한 전제정권에 대한 극단적 이해와 맞물려 그런 일들이 그런 정권 아래서는 보편적으로 일어났었다고 느끼게 된다는 점이다. 아울러 이 수기의 사실성에 더욱 의문을 갖게 하는 것은 이 수기가 씌여진 시점이다. 글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저자는 자신이 사형당할 날을 미리 알고 그날에 맞춰 원고를 써나간다. 사형 열흘전에 쓰기 시작해 절묘하게 사형 전날 완성한다. 아무리 전범일지라도 몇월 몇일날 사형한다고 알려주는 지도 의문이지만 그렇게 딱 맞춘다는 것도 영 석연치 않다. 한가지 더 의문을 품자면 내용이 너무 맞춤글 같다는 점이다. 연합군측이 원했을 모든 내용이 참 짜임새있게 버무려져 있다. 이 전쟁이 악마에 대항한 얼마나 숭고한 전쟁이었는지 명료하게 알려주는 듯.
이 책의 원제가 안나와서 제목이 직역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책 제목을 처음 보았을때 '당혹스럽게도 옛날 생각'이 났다. 고등학교 때 야간자율학습 땡땡이 치고 간간 영화관에 갔었는데 자주 이용하던 곳 중의 하나가 청량리역 못미처에 있던 성인물을 주로 상영하던 음습한 극장이었다. 거기서 봤던 여러 영화중 독특하게 기억에 남는 영화가 한편 있었는데 제목은 기억이 안난다. 때는 바야흐로 2차세계대전, 장소는 여자가 소장인 독일의 한 포로수용소. 무지 남자를 밝히는 이 여자는 포로 중에서 쓸 만한 남자를 자기 침실로 끌여 들여 재미를 보는 것으로 낙을 삼는데 문제는 남자가 사정을 하면 죽여버리는 사마귀 같은 여자라는 것. 그러던 중 우리의 주인공이 포로로 잡혀 온다. 건장한데다 미남자인 이 남자 당연히 소장의 낙점을 받는다. 넌 이제 죽었다며 침통해 하는 동료 포로들. 그러나 아무렇지 않은 듯 여유있는 미소를 짓던 주인공은 죽지 않고 살아 돌아왔다. 어떻게? 그는 자신이 원치 않으면 사정을 절대 하지 않는 괴물이었다. 예상되듯 수용소장은 이 매혹적인 '물건'에 점점 빠져들고 그녀가 혼미한 틈을 타 연합군이 이 수용소를 점령한다. (뒷부분은 기억이 정확치 않은데 포로들이 탈출했던 것인지도 모르겠고... 아무튼 이 영화가 보여주고 싶은 것은 뭐 탄탄한 스토리가 아니라 이 독특한 물건과 음란한 소장이 기기묘묘한 결합을 보여준다는 것이 핵심이었으니까.)
그때야 몰랐지만 지금 돌이켜 보니 감독이 의도했든 아니든(별로 의도한 것 같지는 않지만) 이 영화는 나름 두가지 이미지를 동시에 던져 주었던 것 같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독일포로수용소의 이미지를 반전시키는 유머가 있는 반면 여성 포로수용소장에 의한 남성지배라는 전도된 가치를 다시 남성 상위로 복원시키는 요소가 공존하는데 이는 '독일제국의 유럽 점령이라는 전도에 맞선 연합군의 승리가 정의의 복원이 된다'라는 정치적 메타포로 이해될 수 있는 소지가 충분하다.
이런 이해는 우리가 상식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2차대전의 신화와도 똑 맞아 떨어진다. 파시즘이라는 악마에 대항한, 연합국이라는 천사들의 싸움이라는 신화. 그러나 과연 그럴까? 그 천사들인 미국,영국,프랑스 등이 악마의 제국인 독일, 이탈리아, 일본 보다 전 세계에 훨씬 더 많은 식민지를 가지고 있었고 원주민들을 악마의 제국들 못지않게 학살하고 수탈했었던 사실은 신화의 어디쯤에 자리를 잡아야 할까? <지옥의 여감방>에서 고백됐던 일들이 연합국이 지배하던 식민지의 어떤 수용소에서는 일어나지 않았을까? 우리가 일제에 대해 기억하듯, 모든 식민지들은 식민본국의 잔혹한 통치를 기억한다. 그럼에도 2차대전이라는 상황 속에서 식민지들은 왜 그토록 쉽사리 연합군과 주축국을 선악으로 가르고 스스로를 연합국에 동조시키는 것일까?
프랑스 국기에 경례하는 흑인병사의 사진이라는 기표를 보면서 바르트가 흑인병사까지도 자랑스레 복무하는 프랑스 제국주의의 위대성이라는 내포된 기의를 읽었다면 나치시대 수용소를 다룬 이 책의 표지에서 우리는 어떤 신화를 읽을 수 있을까?
나처럼, '원하는 대로 사정을 조절할 수 있는 괴물이 저기에 산다'는 건 아니겠지^^?
힐텍가아드 고프 저, 이문수 역, 선경도서, 1970년 발행.
'글들 > 책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小倉家(四日市)並某家入札目録 중 東坡 (0) | 2011.09.21 |
---|---|
은밀했던 최초의 일본소설 열풍 (0) | 2010.02.09 |
홍윤숙 시집 <장식론> (0) | 2009.09.09 |
정통 합기도교본 (0) | 2009.09.08 |
경자와 숙자 (0) | 2007.07.13 |